반응형 국혼(國魂) 시리즈64 제33편 노덕술 — 고문을 기술로 만든 인간 ① 인물 개요노덕술(盧德述, 1899~1968)은 경남 울산 출신의 일제 경찰로,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가를 잔혹하게 고문한 대표적인 친일 고등계 형사다. 그는 순사보로 시작해 평양경찰서 고등과장, 경시(총경급)에 이르며 일제 경찰의 폭력 체계를 몸소 실현한 인물이었다. 해방 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다시 경찰과 군 수사기관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의 이름은 해방 이후까지 ‘고문의 대명사’, 그리고 ‘폭력을 제도화한 인간’으로 남았다.② 주요 행적1920년대 울산·부산 지역에서 학생운동 및 독립운동가 탄압. 1930년대 평양경찰서 고등과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불법 체포·고문. 1943년 경시로 승진, 전시 체제하 보안과장으로 활동. 해방 후에도 미군정·이승만 정권 아래.. 2026. 4. 2. 제32편 윤택영 — 왕실의 장인에서 제국의 신하로 변한 귀족 ① 인물 개요윤택영(尹澤榮, 1873~1940)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왕실 외척형 친일귀족이다. 그의 딸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妃)로, 윤택영은 고종의 사돈이자 순종의 장인이었다. 왕실 외척으로 절대적인 권세를 누리던 그는,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곧바로 일본에 협력해 제국의 후작(侯爵) 작위를 받고 살아남았다. 그는 의리보다 생존을, 명예보다 재산을 택한 귀족적 현실주의자이자 배신자였다.② 주요 활동과 생애1873년 파평윤씨 가문 출생. 1904년 딸이 순종과 혼인하면서 왕실 외척으로 급부상. ‘조선 제일의 권문세가’로 불리며 재정·정치에 막대한 영향력 행사.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의 통치 질서에 순응하며 후작 작위와 특혜를 받음. 조선귀족회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일제의 .. 2026. 3. 31. 제31편 백낙준 — 지성으로 나라를 세우고, 권력에 무릎 꿇은 교육자 ① 인물 개요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평안북도 곽주군 출신의 기독교계 지식인이자 교육자였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초대 총장이며, 한국어·한국사 교육의 틀을 세운 국학과 민족학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내선일체를 찬양하고 학병 모집을 선동한 지식인, 해방 이후에는 정치와 교육, 종교의 권력자, 말년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회개한 지성인으로 남았다. 그의 삶은 한국 근대 지식인의 모든 그림자를 품고 있다’ 시대에 깨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인간의 초상.② 주요 활동과 사상평안북도 곽주 출생. 미국 파크대학·프린스턴·예일대학원에서 신학·철학 전공.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이후 교장·총장으로 승진.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의 .. 2026. 3. 29. 제30편 최린 — 신앙을 팔고, 권력을 쫓고, 끝내 자신을 잃은 사내 ① 인물 개요최린(崔麟, 1878 ~ 1956 추정)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천도교 지도자이자 3·1운동 민족대표였다.그러나 해방 전에는 제국에 충성한 종교인, 해방 후에는 신앙에서 제명된 인간으로 남았다. 그의 인생은 “하늘을 믿던 자가 권력을 믿게 된 이야기”였다.② 주요 활동과 사상1899년 동학 입교 후 천도교 개혁운동 주도.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 옥고를 치르며 “인내천(人乃天)” 사상 전파. 출옥 후 손병희 사후 교단 지도권을 장악, 종교 지도자에서 정치가로 변모. 초기의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를 믿었지만, 이상보다 권력과 생존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로 바뀌었다.③ 변절의 과정 — 왜 반일에서 친일로 돌아섰는가1️⃣ 3·1운동 실패의 절망감옥에서의 최린은.. 2026. 3. 27. 제29편 홍난파 — 조선의 선율로 제국을 찬양한 천재 ① 인물 개요홍난파(洪蘭坡, 1898 ~ 1941)는 한국 근대음악의 개척자이자, 식민지 조선에서 예술로 제국을 찬양한 대표적 음악가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옛 동산에 올라’ 등으로 민족의 정서를 노래했지만, 말년엔 제국의 군가와 황국신민의 찬가를 작곡하며 예술의 순수성을 잃었다.② 성장과 음악적 배경1898년 경기도 화성(옛 수원군 남양면) 출생. 개화기에 기독교 선교학교에서 음악을 배우며 서양음악에 눈을 뜸. 1910년 일본 도쿄음악학교 유학, 이후 귀국 후 음악교육과 작곡 활동 전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음악 칼럼을 연재하며 “음악은 국민정신을 고양시키는 예술”이라 설파했다. 그의 초기 음악은 민족의 슬픔과 희망을 담은 서정이었다. 〈봉선화〉(1920)는 일제의 탄압 속 민중의.. 2026. 3. 25. 제28편 윤치호 — 개화의 깃발을 들었으나, 제국의 노예가 되다 ① 인물 개요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조선 말기의 대표적 개화파이자 기독교 계몽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독립협회·대한자강회 등을 이끌며 자주와 근대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일제에 협력한 지성의 배신자로 역사의 비판대에 섰다. 개화의 선봉에서 출발해 식민지 권력의 품으로 돌아간 그는, 조선 지식인의 가장 비극적인 얼굴이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윤치호는 어려서부터 한문과 서양학문을 함께 익혔고, 1880년대 미국으로 유학해 감리교 신앙과 자유주의 사상을 접했다. 귀국 후에는 개화운동에 참여하며 “교육이 민족의 힘이며, 계몽이 독립의 길이다”라고 주장했다. 1896년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여 ‘자주·자강·자유민권’을 내세웠지만, 고종의 탄압으로 협회가 해산되자 정치적 회의에 빠졌다. 이후 YMCA와.. 2026. 3. 2. 이전 1 2 3 4 ··· 1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