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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2

제11편 신채호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① 인물 개요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오늘날의 대전광역시 중구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2세에 서당 과정을 마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조선의 자주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5년 2월, 성균관박사(正七品) 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곧바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근대 계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유학의 한계를 벗어나 서구 사상과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며 ‘정신의 독립’을 깨닫기 시작했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신채호는 펜을 들었다. 그는 언론을 통해 민족의 각성을 호소하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기자이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일제의 침략과 친일 관료.. 2025. 11. 5.
제2편 이상재 — 양심으로 나라를 지킨 스승 ① 인물 개요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교육·종교·계몽운동의 세 분야에서 민족정신을 지켜낸 지도자였다. 본관은 한산(韓山),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이다.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며 기존의 관료 체제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박정양의 식객으로 들어가 조언과 문서 업무를 맡으며 보좌했다.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파견될 때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 일본의 근대 문명과 교육제도를 직접 목격했다. 또한 1883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비서로 함께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의 학교, 교회, 의회 등을 견학하며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 근대 교육의 본질을 체험했다...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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