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인물 개요
노덕술(盧德述, 1899~1968)은 경남 울산 출신의 일제 경찰로,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가를 잔혹하게 고문한 대표적인 친일 고등계 형사다. 그는 순사보로 시작해 평양경찰서 고등과장, 경시(총경급)에 이르며 일제 경찰의 폭력 체계를 몸소 실현한 인물이었다. 해방 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다시 경찰과 군 수사기관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의 이름은 해방 이후까지 ‘고문의 대명사’, 그리고 ‘폭력을 제도화한 인간’으로 남았다.
② 주요 행적
1920년대 울산·부산 지역에서 학생운동 및 독립운동가 탄압. 1930년대 평양경찰서 고등과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불법 체포·고문. 1943년 경시로 승진, 전시 체제하 보안과장으로 활동. 해방 후에도 미군정·이승만 정권 아래 경찰 간부로 재등용.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석방. 이후 육군범죄수사단장 등으로 복귀해 권력 아래에서 활동.
③ 고문의 이름 — 다섯 생명의 기록
1930~1934년, 그가 평양경찰서 고등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손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운동가는 최소 다섯 명.
| 이름 | 주요 활동 | 사망 경위 |
| 이인 | 의열단원 | 평양경찰서 고문치사 |
| 한휘 | 신간회 간부 | 취조 중 사망 |
| 이병희 |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
| 박기하 | 학생운동가 | 수침(水沈) 고문으로 사망 |
| 김준연 | 청년운동가 | 심문 중 구타치사 |
“피고 노덕술은 고문에 능하여, 피의자 심문에 항상 고문을 병행하였다.” — 『반민특위 조사기록집』 제4권
그의 고문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허락한 기술이자 시스템이었다.
④ 해방 이후 — 체제가 그를 보호하다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했을 때, 그는 법정에서도 오히려 당당했다.
“나는 국가를 위해 일했을 뿐이다.”
결국 그는 이승만의 직접 지시로 석방되었고, 친일청산의 실패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만들어낸 고문기술은 이후 경찰·군 수사기관에 그대로 남아 해방 이후에도 ‘체제의 언어’로 작동했다.
⑤ 폭력의 유산 — 이근안으로 이어진 그림자
노덕술은 사라졌지만, 그가 제도화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십 년 뒤, 이근안이라는 이름으로 그 유산은 되살아났다. 이근안은 유신정권 시절 민주인사들을 고문한 ‘고문 기술자’로 불리며, 노덕술이 남긴 수사 체계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한 사람은 식민지에서 폭력을 배웠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국가에서 폭력을 이어받았다. 노덕술이 만든 시스템은 국가가 폭력을 ‘치안’이라 부르던 시대를 만들었다.
⑥ 오늘의 시사점
노덕술은 단지 한 사람의 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폭력을 제도화하고, 법의 이름으로 인간을 짓밟을 수 있음을 증명한 시스템의 얼굴이었다. 그를 용서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그를 필요로 한 권력이었다.
⑦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체제를 섬겼고, 체제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⑧ 출처
『반민특위 조사기록집』 제4권 (194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5』,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집 — 세 차례의 노덕술 재판』
『오마이뉴스』 “고문 기술자 노덕술, 대한민국의 어두운 원형” (2020.02.13)
'국혼(國魂)을 팔은 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32편 윤택영 — 왕실의 장인에서 제국의 신하로 변한 귀족 (0) | 2026.03.31 |
|---|---|
| 제31편 백낙준 — 지성으로 나라를 세우고, 권력에 무릎 꿇은 교육자 (1) | 2026.03.29 |
| 제30편 최린 — 신앙을 팔고, 권력을 쫓고, 끝내 자신을 잃은 사내 (0) | 2026.03.27 |
| 제29편 홍난파 — 조선의 선율로 제국을 찬양한 천재 (0) | 2026.03.25 |
| 제28편 윤치호 — 개화의 깃발을 들었으나, 제국의 노예가 되다 (0) | 2026.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