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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4

제21편 이재명 — 명동의 칼, 조선의 마지막 의기(義氣) ① 인물 개요 조선을 위해 칼을 든 23세의 청년, 이재명(李在明, 1887~1910). 평양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었으나, 1905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고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공립협회 LA 지방회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했고, 독립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는 것임을 깨달았다.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는 매국노 처단을 결의했고, 그 순간 이재명은 손을 들었다. “제가 이완용을 맡겠습니다.” 스물한 살 청년의 손끝에서 조선의 분노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② 하와이에서 시작된 독립의 씨앗 — 조직이 맡긴 임무공립협회는 개인적 의분이 아닌 해외 독립조직이 공식 승인한 작전으로서의 의거를 추진했다. 처단 대상은 두.. 2025. 11. 27.
제12편 조민희 — 충절의 집안에서 태어나, 배신의 이름으로 죽다 ① 인물 개요조민희(趙民熙, 1857~1939)는 양주 조씨, 조선 명문가 출신으로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충신 조병세의 7촌 조카다. 또한 그는 이완용의 처남으로, 권세와 혈연의 양쪽 고리에 얽혀 조선 말기의 권력 중심에 섰다. 한때 고종의 신임을 받아 내부대신, 법부대신, 탁지부대신 등을 지내며 정계의 핵심에 올랐지만, 1910년 경술국치 조약 체결에 적극 협조해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일본 제국의 조선귀족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충절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귀의 유혹 앞에 스스로 명예를 버렸다.② 주요 행적조선 말기 내각의 중추 인물로 고종의 신임을 받음. 을사늑약 체결 당시 침묵으로 일제의 강압을 사실상 묵인. 1910년 경술국치 체결에 협조하며 조선귀족(자작 작위)으로 임명. 일제 강점기.. 2025. 11. 8.
제7편 임선준 — 조용히 서명한 관료, 조국의 숨을 멈추게 하다 ① 인물 개요임선준(林善準, 1851~1910)은 한성부 출신으로, 충청북도 진천을 본관으로 한 진천 임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리로 진출하던 명문 사대부 가문으로, 조선 후기의 중앙 관료층에 속한 ‘안정된 권세 가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과 공부에 능했고, 1885년(고종 2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수찬, 승정원 주서, 그리고 시종원 좌시종 등 왕실 근처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온화하고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신중함은 결국 침묵으로 공모한 배신의 형태로 남았다.② 주요 행적임선준은 고종의 신임을 받아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 요직을 거치며 조선 후기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며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을.. 2025. 10. 31.
제1편 이완용 — 국혼을 찢은 이름 “나라를 팔아 부귀를 샀지만, 그 이름은 영원히 역사의 저주가 되었다.”① 인물 개요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을사오적·정미7적·경술국적을 모두 거친 유일한 인물로, 근대 조선의 ‘배신의 상징’으로 남았다. 경기도 광주 낙생면(현 성남 분당) 출신으로 몰락 양반가의 차남이었으나, 10세 무렵 33촌 지간의 족숙 이호준(감찰공파)의 양자로 들어가며 권력가 가문의 문턱에 서게 된다. 이 입적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양부의 인맥을 통해 조정에 진입했고, 이후 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발탁되며 외교 감각과 일본식 근대 질서를 흡수할 기회를 얻었다.② 권력과 배신의 길1895년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의 학부협판으로 발탁되어 친일 개화파의 핵심이 된다. 1905년 외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서명, ‘을사오적..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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