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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팔은 자

제1편 이완용 — 국혼을 찢은 이름

by daonara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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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 AI 생성 이미지

 나라를 팔아 부귀를 샀지만, 그 이름은 영원히 역사의 저주가 되었다.”

인물 개요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을사오적·정미7·경술국적을 모두 거친 유일한 인물로, 근대 조선의배신의 상징으로 남았다. 경기도 광주 낙생면(현 성남 분당) 출신으로 몰락 양반가의 차남이었으나, 10세 무렵 33촌 지간의 족숙 이호준(감찰공파)의 양자로 들어가며 권력가 가문의 문턱에 서게 된다. 이 입적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양부의 인맥을 통해 조정에 진입했고, 이후 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발탁되며 외교 감각과 일본식 근대 질서를 흡수할 기회를 얻었다.

 권력과 배신의 길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의 학부협판으로 발탁되어 친일 개화파의 핵심이 된다. 1905년 외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서명,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 된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령을 주도하며, 의병 진압의 명령을 내렸다. 1909년 송병준과 함께 합방동지회를 조직, 조선의 자주권을 일본에 넘기기 위한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연금을 받고 조선총독부 자문역으로 활동했다. 그의 출세는 조국의 몰락 위에서 피어난 부귀였다.

 가문과 의붓형탐욕의 뿌리

이완용은 의붓형 이윤용과 함께 권세를 나누어 가졌다. 이윤용은 대원군의 사위로서 매관매직과 부패로 악명을 떨쳤고, 이완용은 그런 형의 후광 아래 권력의 문을 여는 기술을 배웠다. 둘은 왕실의 권세에 기대어 부귀를 쌓았지만, 그 부는 백성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심지어 같은 친일파였던 윤치호조차 일기에서 이렇게 남겼다.

 이완용은 조국의 이름을 팔아 부귀를 얻은 자, 그러나 그 부귀는 죄악의 이자일 뿐이다.”

 언론과 재산의 기록

그의 죽음 이후, 세상은 그를국혼의 배신자로 기억했다. 1926 2 13일자 동아일보횡설수설란은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구문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

(나라를 팔아먹은 자가 지옥에서도 나라를 팔까 걱정된다는 뜻)

다음날 기사에는지옥으로 갈 터이니, 고생길이 훤할 것이다라는 문장까지 실렸다. 그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997, 그의 증손자가 정부를 상대로 북아현동 토지 반환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완용이 일제강점기 보유했던 부동산은 676만 평, 그중 환수된 비율은 0.05%에 불과했다. 그의 후손들은 땅을 되찾고, 매각한 뒤 해외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조선은 그를 저주했지만, 세상은 그 유산을 아직도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역사적 평가

그는내가 아니면 조선은 더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라 변명했지만, 그 말은 자신이 일본의 하수인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의 무덤은 훗날 파헤쳐져 돌 하나 남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성을 바꾸어 숨어 살았다.

⑥ 다온의 한줄 정리

국혼을 찢은 이름, 이완용.

권세의 문턱에서 부귀를 얻었으나, 그 문 너머엔 백성의 피가 흘러 넘쳤다.

⑦ 출처

《동아일보》 1926.2.12~13, 「횡설수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경제신문》, 〈이완용 후손, 일제 때 땅 712평 돌려받아〉, 1997.

《매일경제》, 〈친일파 재산 환수 0.05%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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