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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편 유학주 — 법의 이름으로 항일을 재단한 판관 ① 인물 개요유학주(柳鶴周, 생몰년 미상, 1850년대생 추정)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활동한 사법·행정 관료형 친일 인물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1907년 평리원 판사로 임명되었고, 일본의 통제 아래 의병 관련 재판을 담당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 체제에 협력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유학주는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지만, 그의 이름은 “법의 외피로 포장된 식민 협력”의 대표 사례로 남았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유학주는 평안북도 구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절 행정 관료로 관직에 올랐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통감부가 사법권을 장악하던 시기, 그는 최고 사법기관인 평리원의 판사로 발탁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일본 통감부의 .. 2025. 11. 19.
제16편 윤시병 — 이름 없는 일진회 간부, 그러나 분명한 매국의 발자취 ① 인물 개요윤시병(尹始炳, 생몰년 미상)은 대한제국 말기의 관리이자 일진회 간부로 활동한 인물이다. 을사늑약 체결에 직접 서명한 ‘을사오적’은 아니었으나, 그 이후 일본의 보호정책을 옹호하고 합방 찬성 여론을 퍼뜨린 실무 세력 중 한 명으로 기록된다. 경상도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관직 경력을 바탕으로 지역 민심을 동원해 일진회의 조직 확장에 앞장섰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윤시병은 본래 개화적 사상을 표방하며 근대 교육과 산업 진흥을 주장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며 점차 일본 중심의 근대화론으로 기울었다. 그는 1904년 송병준·이용구 등이 주도한 일진회에 합류하여 지방 조직 운영과 회원 모집을 담당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그는 “조선이 일본의 문명을 받아야 살아남는다”는.. 2025. 11. 18.
제16편 이시영 — 형제의 뜻을 끝까지 지킨 마지막 사람 ① 인물 개요이시영(李始榮, 1868~1953) 은 안동 이씨 명문가 여섯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나, 형제들과 함께 가문의 재산을 버리고 독립운동의 길에 올랐다. 그는 형 이회영이 사상의 불꽃으로 불타올랐다면, 냉철한 행정과 원칙으로 임시정부의 뼈대를 세운 사람이었다. 서간도에서 그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실무와 행정, 그리고 독립운동 조직의 재정 관리까지 맡으며 실질적 중심 역할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훗날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주역들을 길러낸 독립군의 요람이 되었다.② 임시정부의 실무자 — 좌우를 아우른 온건한 조정자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법무총장·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살림과 제도를 책임졌다. 그는 좌파와 우파가 대립하던 시기에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온건한 우파 민족주의.. 2025. 11. 15.
제15편 이용구 — 개화의 이름으로 민족을 저버린 자 ① 인물 개요이용구(李容九, 1868~1912)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젊은 시절 동학(東學) 에 심취하며 평등과 자강의 이상을 품었던 인물이다. 그는 한때 농민과 백성의 삶을 구제하고 조선을 새롭게 바꾸겠다는 뜻을 지녔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 이상은 왜곡되고 만다. 동학 내부에서 그는 개화와 문명화를 주장했으나, 이후 일본 세력의 근대화를 찬양하면서 “외세 의존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결국 그는 동학에서 제명당했고, 이 사건은 훗날 손병희가 천도교로 조직을 개편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동학에서 축출된 뒤 이용구는 “일본의 문명과 제도를 배워야 조선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에 따라1904년 송병준과 함께 일진회(一進會) 를 창립했다. 일진회는 표면적으로는 자강과.. 2025. 11. 14.
제15편 이회영 — 귀족의 부를 버리고, 사상의 불꽃이 된 혁명가 ① 인물 개요이회영(李會榮, 1867~1932)은 조선 광해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오성과 한음의 오성) 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 정치·학문 양면에서 이름을 떨친 안동 이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명동·소공동·충무로 일대에 광대한 대지를 소유했고, 서울의 대표적 상류층이자 교육·관직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는 부귀를 지키는 대신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한일 합병의 소식이 전해지던 1910년 여름, 그는 형제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의 부귀는 나라 위에서 서 있다. 나라가 무너지면, 우리의 부도 죄가 된다.”그는 신분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양심으로 독립을 선택한 귀족 혁명가였다.② 여섯 형제의 결단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이호영, 이원영, 이철영 안동 이씨 여섯 형제는 한날 한.. 2025. 11. 13.
제14편 민영기 — 몰락한 왕가의 그늘 아래서 권력에 기생한 자 ① 인물 개요민영기(閔泳綺, 1861~1936)는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관료로, 명성황후 민씨 가문과 인척 관계를 가진 인물이다. 완성군 이희의 외손자로 알려졌으며, 방계이긴 하지만 왕실과 연결된 인맥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쌓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군직을 지냈으며, 정치 격변기 속에서 현실적 선택을 통해 권력 주변에 자리 잡았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민영기는 근왕 성향의 무인이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정국의 불안 속에서 현실적 노선을 택했다. 1900년대에 들어 일본이 조선을 사실상 지배하자 그는 권력의 향방을 읽고 점차 친일적 태도를 드러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로 임명되어 식민지 경영에 적극 참여했다. 이 회사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체계.. 202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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