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47 제14편 윤세주 — 싸움의 끝에서 사라진 불꽃 ① 인물 개요윤세주(尹世胄, 1900~1942)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약한 나라의 청년이 배움을 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조국의 현실에 분노했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지만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해 자퇴하고 귀향한다. 이 시기 그는 같은 지역 출신의 청년 김원봉을 만나며 생애의 길을 결정짓게 된다. 윤세주는 스스로를 “펜보다 총을 들어야 할 세대의 사람”이라 여겼고, 그 결심은 곧 망명으로 이어졌다.② 국내 활동과 사상 형성10대 후반의 윤세주는 이미 항일학생운동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경성 시절 그는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적 발언에 항의하며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학교에서 배움은 죄다”라며 퇴학을 감수했다. 고향 밀양으로 돌아온 그는 .. 2025. 11. 11. 제13편 민병석 — 권력의 향기 속에서 의혹을 남긴 대신 ① 인물 개요민병석(閔丙奭, 1858~1940)은 여흥 민씨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보호하며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문과에 급제한 뒤 내무대신·법부대신·의정부참정대신 등을 지내며 조선 말기 핵심 권력층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출세는 능력보다 인맥에 기대어 쌓은 권력의 탑이었다. 명성황후 사후에는 이완용 집안과 혼맥으로 이어지며, 조선의 2대 친일 귀족으로 불릴 만한 기반을 굳혔다.② 주요 행적민병석은 고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조선의 중심으로 올라섰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권력의 중심, 일본의 그림자를 향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부터 일본 측과 긴밀히 교류하며 친일 내각의 핵심 인물로 자리했고, 19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에 초청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 그의 이름은 그때부터.. 2025. 11. 10. 제13편 김원봉 — 의열의 불꽃, 통합의 길로 ① 인물 개요1898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태어난 김원봉(金元鳳) 은 일제강점기의 청년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혁명가였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이상보다 실천을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폭탄에서 시작해 통합으로 끝난 조선 독립운동의 굴곡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그는 한학과 신식교육을 병행하며 공부했다. 밀양의 보광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던 김원봉은 교과서 속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이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구절을 보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살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이 한마디는 그의 인생 방향을 바꿨다. 조선 안에서의 저항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는 총도, 언론도, 자유도 없다”며 결국 행동의 무대를 해외로 옮기기로 .. 2025. 11. 9. 제12편 조민희 — 충절의 집안에서 태어나, 배신의 이름으로 죽다 ① 인물 개요조민희(趙民熙, 1857~1939)는 양주 조씨, 조선 명문가 출신으로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충신 조병세의 7촌 조카다. 또한 그는 이완용의 처남으로, 권세와 혈연의 양쪽 고리에 얽혀 조선 말기의 권력 중심에 섰다. 한때 고종의 신임을 받아 내부대신, 법부대신, 탁지부대신 등을 지내며 정계의 핵심에 올랐지만, 1910년 경술국치 조약 체결에 적극 협조해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일본 제국의 조선귀족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충절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귀의 유혹 앞에 스스로 명예를 버렸다.② 주요 행적조선 말기 내각의 중추 인물로 고종의 신임을 받음. 을사늑약 체결 당시 침묵으로 일제의 강압을 사실상 묵인. 1910년 경술국치 체결에 협조하며 조선귀족(자작 작위)으로 임명. 일제 강점기.. 2025. 11. 8. 제12편 안창호 — 성실의 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실천가 ① 인물 개요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천리마구역)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안창호(安昌浩, 호 도산) 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안재욱의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그는 근면과 성실, 그리고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으며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려야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을 품었다. 그의 호 ‘도산(島山)’ 은 “섬처럼 고요히 자신을 지키며 진실과 정의 위에 서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평생 그가 실천한 겸허함과 도덕적 강직함의 상징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불타고 도시 곳곳이 폐허로 변했다. 그는 그 참상을 직접 보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마음속에 새겼다. “나라의 힘은 총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 이 각성은 그를 서울로 이끌었다... 2025. 11. 7. 제11편 송병준 — 변절의 설계자, 일진회의 얼굴 ① 인물 개요송병준(宋炳濬, 1858~1925)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본관은 은진이다. 부친은 율학훈도 송문수이며, 어린 시절 서얼 신분의 차별을 받았으나 재능과 야심으로 관직에 올랐다. 1871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참군,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구로다 기요타카 일행을 접대하면서 일본 세력과 인연을 맺었다. 이때부터 송병준의 인생은 조선이 아닌 일본을 향하게 된다.② 주요 행적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며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긴 그는 1886년 일본에서 김옥균 암살 밀명을 받았다. 그러나 실행 대신 김옥균과 가까워져 귀국 후 통모 혐의로 투옥,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송병준은 방향을 완전히 틀어 일본으로 향했다. 1895년 무렵 일본으로 망.. 2025. 11. 6.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