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47 제11편 신채호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① 인물 개요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오늘날의 대전광역시 중구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2세에 서당 과정을 마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조선의 자주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5년 2월, 성균관박사(正七品) 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곧바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근대 계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유학의 한계를 벗어나 서구 사상과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며 ‘정신의 독립’을 깨닫기 시작했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신채호는 펜을 들었다. 그는 언론을 통해 민족의 각성을 호소하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기자이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일제의 침략과 친일 관료.. 2025. 11. 5. 제10편 이재곤 — 법으로 조국을 판 황족 ① 인물 개요이재곤(李載崑, ?~1911)은 조선 왕실의 직계 종친으로, 영조의 손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隱信君)의 양자이며, 남연군 이구와 군부인 여흥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즉, 고종과 같은 항렬의 황실 인물로, 왕실의 피를 이은 인물이었다. 나라를 지켜야 할 책임이 가장 무거웠던 그가, 결국 조선의 법과 왕실의 명예를 팔아 넘긴 첫 황족이 되었다.② 주요 행적이재곤은 대한제국 시절 법부대신으로 재임하며, 1907년 일본이 강요한 정미7조약 체결에 참여해 정미칠적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의 군사권과 사법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데 앞장섰고, 이는 대한제국이 스스로의 법으로 자멸하는 결과를 낳았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도 합병에 찬성해 일본 제국으로부터 남작.. 2025. 11. 3. 제9편 고영희 — 조약의 펜 끝, 나라의 살림을 넘긴 실무형 배신자 ① 인물 개요고영희(高永喜, 한성부 출생)는 역관(譯官) 고진종의 가문에서 태어난 관료로, 개화기 이후 내무·학부·탁지·법부 등 핵심 부처의 실무를 두루 거친 행정가형 인물이었다. 명민하고 꼼꼼한 행정가로 평가받았지만, 그 재능은 국가를 살리는 데가 아니라 식민 권력을 위해 쓰였다.② 주요 행적1890년대 후반부터 내무·학부(교육)·탁지(재정)·법부(사법) 요직을 전전하며, 조선 행정의 실무를 장악.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당시, 이완용 내각의 학부·탁지 수장으로 참여. 일본 통감부가 요구한 재정 고문제와 예산 통제 체제를 실무로 설계·집행. 조선의 세입·세출, 차관 운용이 통감부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도록 바꾸는 역할 수행. 고종의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 조치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묵묵히.. 2025. 11. 3. 제10편 이승훈 — 상업에서 깨어난 민족의 스승 ① 인물 개요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승훈(李昇薰) 은 젊은 시절 상업에 전념하며 실리를 좇던 근대적 상인이었다.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과 교류하며 경영 감각을 익혔고, 조선의 낡은 질서에서 벗어난 실력 중심형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 자본이 한반도 경제를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의 횡포와 행정적 차별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승훈의 사업 또한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나라가 약하면 개인의 노력도 헛되다”는 현실을 절감했고, 이때부터 상인의 길을 내려놓고 민족의 자립과 교육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② 각성과 신민회 활동1907년,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실력양성운동의 뜻에 깊이 공감하며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했다. 이승훈은 .. 2025. 11. 3. 제9편 서재필 — 펜으로 독립을 쓴 조선의 첫 지식인 ① 인물 개요1864년 전라남도 보성의 유학 집안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조선의 개화와 민주주의를 세운 ‘지식의 혁명가’였다.그는 붓으로 싸웠고, 언론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그의 글은 총보다 강했고, 그의 생각은 시대보다 한 세기를 앞서 있었다. 서재필은 조선의 개화파 정치가이자 언론인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사상의 뿌리를 심은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해 근대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지식이 사람을 바꾼다’는 신념을 키웠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1895년 귀국한 그는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 《독립 신문》을 창간했다. 신문의 이름부터 ‘독립’이었다. 그는 한글을 사용해 백성들이 직접 세상의 소식을 .. 2025. 11. 3. 제8편 조중응 — 이성으로 배신을 설계한 냉정한 법의 얼굴 ① 인물 개요조중응(趙重應, 1856~1919). 한성부 출신의 양주 조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식견으로 이름을 얻었다.그러나 그 지식은 조국의 자주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북방남개론(北防南開論)’ 을 주장하며 외세의 침탈을 ‘조선의 생존전략’으로 포장했다. 그때 그는 몰랐을까. 지식이 조국을 구하는 칼이 될 수도, 조국을 찌르는 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② 주요 행적1890년대 후반, 조중응은 법부 형사국장, 외부 교섭국장 등을 지내며 정계의 중심에 섰다. 1893년 서북변계 조사위원으로 러시아와 만주 지역을 시찰한 뒤, “조선은 러시아를 막고 일본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훗날 그의 배신을 정당화하는 사상의 씨앗.. 2025. 10. 31.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