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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24

제17편 김좌진 — 청산리의 백야, 독립군의 영혼 ① 인물 개요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충남 홍성 갈산면 행산리 출신으로, 지역의 유력한 지주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세 살 무렵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쏘기·말타기에 능했다고 전해진다.② 양반의 자각 - 노비 해방과 호명학교 설립17세의 김좌진은 가문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고 자택 일부를 개조해 호명학교(浩明學校)를 세웠다. ‘호명(浩明)’은 ‘크게 세상을 밝힌다’는 뜻으로, 무력보다 배움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의 신념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 학교는 근대식 민족교육의 시초로 평가되며, 훗날 홍성 일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③ 투옥과 망명 — 의병에서 군인으로1911년, 김좌진은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을 추진하다 사촌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2025. 11. 19.
제16편 이시영 — 형제의 뜻을 끝까지 지킨 마지막 사람 ① 인물 개요이시영(李始榮, 1868~1953) 은 안동 이씨 명문가 여섯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나, 형제들과 함께 가문의 재산을 버리고 독립운동의 길에 올랐다. 그는 형 이회영이 사상의 불꽃으로 불타올랐다면, 냉철한 행정과 원칙으로 임시정부의 뼈대를 세운 사람이었다. 서간도에서 그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실무와 행정, 그리고 독립운동 조직의 재정 관리까지 맡으며 실질적 중심 역할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훗날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주역들을 길러낸 독립군의 요람이 되었다.② 임시정부의 실무자 — 좌우를 아우른 온건한 조정자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법무총장·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살림과 제도를 책임졌다. 그는 좌파와 우파가 대립하던 시기에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온건한 우파 민족주의.. 2025. 11. 15.
제15편 이회영 — 귀족의 부를 버리고, 사상의 불꽃이 된 혁명가 ① 인물 개요이회영(李會榮, 1867~1932)은 조선 광해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오성과 한음의 오성) 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 정치·학문 양면에서 이름을 떨친 안동 이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명동·소공동·충무로 일대에 광대한 대지를 소유했고, 서울의 대표적 상류층이자 교육·관직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는 부귀를 지키는 대신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한일 합병의 소식이 전해지던 1910년 여름, 그는 형제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의 부귀는 나라 위에서 서 있다. 나라가 무너지면, 우리의 부도 죄가 된다.”그는 신분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양심으로 독립을 선택한 귀족 혁명가였다.② 여섯 형제의 결단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이호영, 이원영, 이철영 안동 이씨 여섯 형제는 한날 한.. 2025. 11. 13.
제14편 윤세주 — 싸움의 끝에서 사라진 불꽃 ① 인물 개요윤세주(尹世胄, 1900~1942)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약한 나라의 청년이 배움을 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조국의 현실에 분노했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지만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해 자퇴하고 귀향한다. 이 시기 그는 같은 지역 출신의 청년 김원봉을 만나며 생애의 길을 결정짓게 된다. 윤세주는 스스로를 “펜보다 총을 들어야 할 세대의 사람”이라 여겼고, 그 결심은 곧 망명으로 이어졌다.② 국내 활동과 사상 형성10대 후반의 윤세주는 이미 항일학생운동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경성 시절 그는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적 발언에 항의하며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학교에서 배움은 죄다”라며 퇴학을 감수했다. 고향 밀양으로 돌아온 그는 .. 2025. 11. 11.
제13편 김원봉 — 의열의 불꽃, 통합의 길로 ① 인물 개요1898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태어난 김원봉(金元鳳) 은 일제강점기의 청년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혁명가였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이상보다 실천을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폭탄에서 시작해 통합으로 끝난 조선 독립운동의 굴곡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그는 한학과 신식교육을 병행하며 공부했다. 밀양의 보광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던 김원봉은 교과서 속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이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구절을 보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살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이 한마디는 그의 인생 방향을 바꿨다. 조선 안에서의 저항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는 총도, 언론도, 자유도 없다”며 결국 행동의 무대를 해외로 옮기기로 .. 2025. 11. 9.
제12편 안창호 — 성실의 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실천가 ① 인물 개요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천리마구역)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안창호(安昌浩, 호 도산) 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안재욱의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그는 근면과 성실, 그리고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으며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려야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을 품었다. 그의 호 ‘도산(島山)’ 은 “섬처럼 고요히 자신을 지키며 진실과 정의 위에 서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평생 그가 실천한 겸허함과 도덕적 강직함의 상징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불타고 도시 곳곳이 폐허로 변했다. 그는 그 참상을 직접 보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마음속에 새겼다. “나라의 힘은 총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 이 각성은 그를 서울로 이끌었다... 2025.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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