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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17편 김좌진 — 청산리의 백야, 독립군의 영혼

by daonara 2025.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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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김좌진 동상 - AI 재생성 이미지

① 인물 개요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충남 홍성 갈산면 행산리 출신으로, 지역의 유력한 지주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세 살 무렵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쏘기·말타기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② 양반의 자각 - 노비 해방과 호명학교 설립

17세의 김좌진은 가문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고 자택 일부를 개조해 호명학교(浩明學校)를 세웠다. ‘호명(浩明)’은 ‘크게 세상을 밝힌다’는 뜻으로, 무력보다 배움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의 신념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 학교는 근대식 민족교육의 시초로 평가되며, 훗날 홍성 일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③ 투옥과 망명 — 의병에서 군인으로

1911년, 김좌진은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을 추진하다 사촌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옥중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았고, 출옥 후 곧장 만주로 망명했다. 1918년, 대한광복회에 참여하고 북로군정서를 창설해 군사교육을 담당하며 독립전쟁의 체계를 세웠다.

④ 청산리 대첩 — 백야의 전설

1920년 10월, 김좌진은 홍범도와 연합해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 정규군 3,000여 명을 격파하며 대한독립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백마와 흰 군복으로 인해 일본군은 그를 ‘백야(白夜) 장군’이라 불렀다.

⑤ 자유시 참변과 신민부

1921년, 독립군은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지휘권 갈등과 소련군의 무장해제 명령으로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김좌진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수많은 전우를 잃었다. 이후 1925년 만주에서 신민부를 결성해 무장투쟁과 자치 행정을 병행하며 ‘새 민족은 스스로의 질서로 세워져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⑥ 한족총연합회와 항일 통합전선

전투의 승리는 찬란했지만, 김좌진의 마음은 ‘단장지통(斷腸之痛)’이었다. 그는 이겼지만 울었고, 나라를 지켰지만 동지를 잃었다. 1929년, 김좌진은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한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의열단 등과 연대했다. 그는 공산주의 노선을 반대하며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을 주장했고,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조정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⑦ 최후의 날

1930년 1월 24일, 중국 해림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향년 41세. 그의 죽음은 사상 대립과 분열이 낳은 비극이었다.

⑧ 근대사적 의의

김좌진은 무장투쟁의 상징이자, 민족자존의 실천가였다. 그가 이끈 청산리 대첩은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조선인이 스스로 싸워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의 유해는 가족에 의해 수습되어 현재 충남 보령시 선산에 안장되어 있다.

⑨ 다온의 한줄 정리

“그의 총은 독립을 위해 들었고, 그의 학교는 미래를 위해 세워졌다.” 

⑩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김좌진」 독립기념관 인물DB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2004) 『청산리대첩 연구』(홍성문화원, 2019) 『김좌진 평전 — 백야의 길』(역사비평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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