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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10편 이승훈 — 상업에서 깨어난 민족의 스승

by daonara 2025.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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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105인 사건 - AI 재구성 이미지

① 인물 개요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승훈(李昇薰) 은 젊은 시절 상업에 전념하며 실리를 좇던 근대적 상인이었다.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과 교류하며 경영 감각을 익혔고, 조선의 낡은 질서에서 벗어난 실력 중심형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 자본이 한반도 경제를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의 횡포와 행정적 차별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승훈의 사업 또한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나라가 약하면 개인의 노력도 헛되다는 현실을 절감했고, 이때부터 상인의 길을 내려놓고 민족의 자립과 교육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② 각성과 신민회 활동

1907,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실력양성운동의 뜻에 깊이 공감하며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했다. 이승훈은 태극서관과 자기회사를 세워 인쇄·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을 추진했고, “배움 없는 독립은 허상이고, 실력 없는 자주는 공허하다.”는 말을 남겼다.

③ 강명의숙과 오산학교

1907년 정주에 강명의숙(講明義塾) 을 세워 청년들과 어린이들에게 글과 산술, 근대 문명을 가르쳤다. 그러나 소학교 수준의 교육만으로는 나라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기를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다. 그는 더 깊은 학문과 인격교육을 위한 학교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뜻이 1910년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으로 이어졌다.

오산학교는 실학과 기독교 정신을 결합한 근대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승훈은지식은 민족을 밝히는 등불이라 강조했고 오산학교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을 넘어 신앙과 실천이 함께하는 민족정신의 산실이 되었다.

④ 신앙과 시련의 길

경술국치 이후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에게 신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무너진 도덕을 다시 세우는 민족의 혼이었다. 그는신앙 없는 애국은 감정이고, 신앙 있는 애국은 행동이다.”라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청년 교육에 헌신했다. 1911, 그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이 독립자금을 모으던 일을 일본이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로 왜곡한 조작극이었다. 일제는 이를 구실로 신민회 지도부를 대거 검거하며 신민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민족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승훈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진실은 언젠가 역사가 증언할 것이다.”라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진실을 지킨 스승으로 남았다.

⑤ 사회운동과 언론 활동

출옥 후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동아일보 창간 참여 등 교육과 산업, 언론을 아우르는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그는배운 자가 행동하지 않으면, 배움은 죄가 된다.”라며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죽음을 앞두고는내 시신을 해부해 학생들의 학습에 쓰게 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삶은 죽음조차 배움의 연장선이었다.

⑥ 근대사적 의의

이승훈은 상인으로 시작해 사상가로, 스승으로 완성된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깨달음이 신념으로, 신념이 행동으로이어진 실천적 독립운동의 본보기였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는 오늘날에도배움이 곧 구국이라는 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⑦ 다온의 한줄 정리

 나라가 약하면 개인도 무력하다. 그는 상업에서 깨어나,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킨 스승이었다.”

⑧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이승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독립기념관 인물DB 「이달의 독립운동가」, 2012 3)

(『한국기독교인물사』, 대한기독교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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