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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8편 최재형 - 연해주에서 독립군의 불씨를 키운 조선의 큰 별

by daonara 2025.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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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동상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1860(철종 11),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난 최재형(崔在亨) 은 가난 속에서도 정의감이 깊었던 소년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수 밑에서 자랐는데, 가난과 편견 속에서 늘쓸모없는 입이라며 구박을 받았다. 어린 최재형은 세상의 부조리보다 모멸의 말이 더 아팠다. 그래서 열세 살 무렵,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향했다. 눈보라 속을 맨손으로 건너던 그는 거의 얼어 죽을 뻔했다. 그때 한 러시아 상선의 선장이 그를 구해주었다. 이 선장은 그를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옷과 음식을 주고,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양자처럼 돌보았다. 이 사건이 최재형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굶주림보다 모멸이 더 고팠다.

하지만 이방인의 손에서 인간의 따뜻함을 배웠다.” 그는 러시아 상인들의 신뢰를 얻으며 통역·무역업에 뛰어들었고, 20대가 되자 연해주에서 손꼽히는 한인 실업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부를 쌓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다. 조선의 피가 흘러 들어온 돈이다.”

 러일전쟁과 한인 사회의 중심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연해주 일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최재형은 혼란 속에서도 한인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 움직였다. 러시아군이 군수품과 인력을 필요로 하자 그는 조선인 노동자를 조직해 러시아군과의 중개인 역할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막대한 신뢰를 얻었고, 얻은 이익은 대부분 한인 학교와 자치단체 운영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의 집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었고, 굶주린 동포에게는 밥을, 병든 이에게는 약을, 청년들에게는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사람들은 그를페치카(печка, 따뜻한 아궁이)’라 불렀다. 그의 집은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는 한인의 집이었다.

 언론과 조직 — ‘권업회와 『대동공보』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그는 한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나라를 잃은 자는 말부터 세워야 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언론과 교육을 시작했다. 1908년 그는 이상설, 이동휘,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 를 결성하고 연해주 지역의 한인 사회를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1911년에는 권업회(勸業會) 를 세워 경제·교육·정치 조직을 아우르는 자치 기구를 운영했다. 같은 해 그는 『대동공보(大東公報)』를 창간했다. 신문에는 일본의 식민정책 비판과 독립 소식, 그리고 국내 의병 소식이 실렸다.

 펜은 총보다 멀리 날아간다. 총은 적을 쓰러뜨리지만, 글은 정신을 일으킨다.”

『대동공보』는 연해주 뿐 아니라 만주·일본·미국까지 전해지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잇는 사상의 가교가 되었다.

 연추의병무기를 든 조선의 불꽃

1908, 최재형은 연추의병(延秋義兵) 을 조직했다. 이 부대는 국내 침투 작전을 펼치며 일본군 보급로를 공격하고, 의병을 보호하며 군자금을 모았다. 그의 집은 무기 저장소이자 회의실, 그리고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는 직접 총을 들지 않았지만, 모든 무기와 자금, 식량이 그의 손을 거쳤다.

 나는 총을 쏘지 않는다. 그러나 총을 쏠 수 있게 한다.”

이 한마디가 바로 그의 철학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자들을 뒤에서 지탱한조선 독립의 그림자였다.

 안중근과의 인연총 뒤의 후원자

1909,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를 준비하던 시기. 그 뒤에는 언제나 최재형이 있었다. 안중근이 연해주로 망명했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도, 총과 자금을 마련해준 사람도 바로 최재형이었다. 안중근은 훗날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최재형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얼빈의 총성은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얼빈 의거 후, 일본 경찰이 안중근의 가족을 체포하자 그는 직접 나서서 보호했고, 러시아 관리에게 편지를 보내 석방을 청원했다. 그는 언제나 앞에 서지 않았지만, 그의 뒷모습이 수많은 청년들에게대인의 품격을 남겼다.

 러시아 혁명 이후혼돈 속의 한인 사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는 볼셰비키와 백군 세력의 내전으로 휩싸였다. 많은 한인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고, 한인 마을은 불안과 폭력 속으로 무너졌다. 최재형은 정치적 편에 서지 않았다. 그는 오직 민족만을 말했다.

 러시아의 적은 내 적이 아니다. 조선의 적은 일본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양측은 모두 그를 의심했다. 결국 그는 일본군과 반볼셰비키 세력 양쪽에서 감시 대상이 되었고, 한때 숨겨놓은 독립군 자금까지 압수당했다.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마지막 불빛

1920 4, 일본군은 연해주 4월 참변(니콜스크 사건) 을 일으켜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그때 60세가 넘은 최재형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의 독립은 하늘의 뜻이다.”

그는 끝내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며칠 뒤 총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니콜스크 근처에 암매장되었고, 지금까지도 정확한 묘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근대사적 의의

최재형은 독립운동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이자 실천가였다. 그는 재산으로 군대를 세웠고, 글로 민족을 일깨웠으며, 행동으로 독립의 길을 열었다. 그가 세운 권업회와 학교, 신문은 훗날 임시정부의 기반이 되었고, 그가 길러낸 청년들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주력이 되었다.

 묘는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연해주의 바람 속에 남아 있다.”

⑨ 다온의 한줄 정리

 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연해주의 별이 되어, 독립의 하늘을 비췄다.”

⑩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최재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독립기념관 인물DB 「이달의 독립운동가」, 2010 7

『러시아지역 한인 독립운동사』(독립기념관, 2018)

『최재형 평전』(도진순, 2014)

『대동공보』 복간본, 연해주 문헌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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