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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13편 김원봉 — 의열의 불꽃, 통합의 길로

by daonara 2025.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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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기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1898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태어난 김원봉(金元鳳) 은 일제강점기의 청년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혁명가였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이상보다 실천을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폭탄에서 시작해 통합으로 끝난 조선 독립운동의 굴곡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그는 한학과 신식교육을 병행하며 공부했다. 밀양의 보광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던 김원봉은 교과서 속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이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구절을 보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살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 한마디는 그의 인생 방향을 바꿨다. 조선 안에서의 저항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이 땅에서는 총도, 언론도, 자유도 없다며 결국 행동의 무대를 해외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국내 활동과 반일 의식의 형성

김원봉은 어린 나이에 이미 조국의 부끄러움을 자각했다. 보광학교 재학 중 일본 헌병이 지역 시장에서 노인을 구타하는 장면을 보고 그 자리에서 항의하다 체포·폭행당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법이 일본의 것이라면, 나는 그 법을 따르지 않겠다고 외쳤다. 그 사건 이후 그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당시 국내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의 감시 아래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김원봉은 현실의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고, 1916 18세의 나이에 밀양을 떠나 경성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망명길에는조국은 멀리서 더 잘 보인다는 다짐이 함께 있었다. 그는 이후 평생 고향 밀양을 다시 밟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싹튼 분노와 정의감이 그의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의열단 창설 — ‘정의의 폭탄을 들다

1919, 3·1운동의 실패 이후 중국 길림성으로 건너간 그는 마침내 뜻을 함께한 청년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을 조직했다. 그는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복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정의를 되찾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

의열단은 일본의 통치 기관과 주요 인사를 직접 응징하는 행동 단체였다. 그는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며 조선총독부,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친일 기관을 폭탄과 권총으로 공격했다. 그의 의열단은 박재혁·나석주·김상옥 등 무수한 청년들을 항일의 최전선으로 이끌었고, 그 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조선혁명선언』사상의 혁명

1923, 김원봉은 사상가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정신적 강령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문서가 『조선혁명선언』 이다. 신채호는 그 선언에서 말했다.

 강도 일본과 타협하지 말고,

물리적 폭력보다 정신의 혁명으로 싸워라.” 김원봉은 이 문장을 의열단의 신조로 삼았다. 그는 단원들에게폭탄보다 정신이 강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의열을 단순한 파괴가 아닌 도덕적 정의의 실천으로 승화시켰다.

 황푸군관학교 — ‘의열에서 조직으로

1920년대 중반, 그는 중국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軍官學校) 에 입교했다. 이곳은 장제스(蔣介石)가 교장, 주은래(周恩來)가 정치교관으로 있던 중국 혁명군의 핵심 교육기관이었다. 김원봉은 이곳에서 지청천, 최용덕, 박진순 등과 함께 정규 군사훈련을 받으며 전략·전술을 익혔다. 그는 이후의열은 고독하되, 독립은 조직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세운다. 그는 폭탄 투쟁의 한계를 깨닫고 조직적인 군사 투쟁과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 학교와 조선의용대의 토대가 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좌우를 잇는 다리

1935, 김원봉은 중국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한다. 이 당은 좌우 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을 아우르려는 최초의 정치적 통합 시도였다. 그는 안창호·조소앙·지청천 등과 연대하며 “총으로 나라를 세우되, 사상으로 국민을 묶자고 주장했다. 그의 이상은총과 철학이 만나는 혁명이었다. 이 시기 김원봉은 폭탄 투쟁의 상징에서 사상적 지도자이자 정치가로 변화한다.

 조선의용대 창설무장 독립의 새로운 길

1938, 김원봉은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이는 임시정부보다 앞서 만들어진 최초의 조직적 한국인 무장 부대였다. 그는 대장을 맡아 직접 전투에 나섰고 중국군과 협력해 일본군을 상대로 중국 화북 지역에서 실전 투쟁을 전개했다. 이 부대는 이후 일부가 한국광복군으로 합류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의 두 축이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독립은 하나의 군대에서 시작된다. 그 군대의 중심은 정신이다.”

 임시정부 참여통합을 향한 이상

1942,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참여해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승만·김구 등과의 노선 차이,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해 내부 갈등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그는조국이 먼저, 이념은 나중이라며 끝까지 통합과 단결의 길을 외쳤다. 그의 신념은단결 없는 독립은 또 다른 패배였다.

 해방 이후분열의 상징이 된 사람

1945년 광복 이후, 김원봉은 상하이에서 귀국했으나 미군정은 그를좌익 인물로 분류했다.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그를 경계하는 시선이 있었고, 좌우 대립이 심화되자 그는 점차 고립되었다. 그는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이 이제 서로를 향해 총을 든다며 깊은 실망을 토로했다. 1948,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되자 그는 결국 북으로 향한다.

 월북과 비극적 최후

북한에서 그는 초대 국가검열상(후의 노동상) 으로 임명되었다. 초기에는통일전선의 상징으로 환영 받았으나, 권력투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1958년경, 숙청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발자취는 여전히 뜨겁다. 그의 삶은행동하는 정의통합의 이상을 동시에 품은 독립운동사의 가장 복잡하고 깊은 여운이었다.

 근대사적 의의

김원봉은의열의 불꽃에서 통합의 길로나아간 인물이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의거조직통합으로 이어지는 한국 무장투쟁사의 진화 그 자체였다. 그는 단순한 폭탄 투사가 아니라 교육과 조직, 사상과 통합을 꿰뚫은 전략가였다. 그의 사상은정의 없는 자유는 폭력이고, 통합 없는 독립은 분열이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⑫ 오늘의 시사점

김원봉의 삶은 영웅담이 아니라 질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디까지 실천할 수 있는가?”

그의 불꽃은 폭발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그는조국이 먼저, 나중은 없다는 말을 남기며 혁명가이자 통합가로서의 길을 완성했다.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폭탄으로 세상을 흔들고, 통합으로 역사를 완성한 혁명가였다.”

⑭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김원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의용대와 김원봉 연구』(한상도, 2006)

독립기념관 인물DB 「의열단과 김원봉」

『신채호 전집』, 『의열단 선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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