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은 조선 광해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오성과 한음의 오성) 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 정치·학문 양면에서 이름을 떨친 안동 이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명동·소공동·충무로 일대에 광대한 대지를 소유했고, 서울의 대표적 상류층이자 교육·관직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는 부귀를 지키는 대신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한일 합병의 소식이 전해지던 1910년 여름, 그는 형제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의 부귀는 나라 위에서 서 있다. 나라가 무너지면, 우리의 부도 죄가 된다.”
그는 신분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양심으로 독립을 선택한 귀족 혁명가였다.
② 여섯 형제의 결단
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이호영, 이원영, 이철영 안동 이씨 여섯 형제는 한날 한시에 모여 결의했다.
“우리 가문의 이름은 없어질지라도, 조선의 이름은 남겨야 한다.”
그들은 가문의 재산 60만 평을 팔아 당시 시가 약 60만 원, 현재 가치로 600억 원이 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다. 집, 토지, 가옥, 심지어 집안의 노비까지 해방시키며 떠났다. 1910년 겨울, 가족 4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 서간도 삼원보로 향했다. 그 길은 귀족의 유배가 아니라, 한 가문의 순교의 행렬이었다.
③ 서간도의 삶 — 신흥무관학교와 형제들의 희생
서간도는 눈보라와 굶주림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 를 세워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길러냈다. 이석영은 자금과 식량을 모두 지원하며 학교 운영을 책임졌으나, 굶주림과 병마로 1925년 초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이름도 표시되지 못한 채 만주의 눈 속에 묻혔다. 이호영은 군자금 조달과 인력 양성에 헌신하다 일제의 밀정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이철영은 병과 굶주림 속에서도 교육과 농사로 버텼으나, 끝내 일제의 수색대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사망했다. 이원영은 병으로 쓰러졌고, 이시영만이 살아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노년 회고에는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던졌으나, 나라를 되찾기엔 그것조차 모자랐다.”
이회영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형제의 혼을 등에 지고 사상의 길로 들어섰다.
④ 고종 망명 시도와 독살설
1919년, 이회영은 고종의 망명 시도를 추진했다. 고종을 해외로 탈출시켜 대한제국의 정통성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세우려 했다. 망명 경로와 자금을 모두 준비했으나, 계획이 실행되기 직전 고종이 갑자기 승하했다. 그 시점은 일제의 감시가 극심하던 때였고, 민중들 사이에서 “고종 독살설” 이 급속히 퍼졌다. 이회영은 “그들의 손에 임금이 쓰러졌다”며 통곡했고,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체제와 왕조를 믿지 않았다.
“조선의 독립은 왕이 아니라 인간의 각성에서 온다.”
이 사건은 그의 사상이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으로 기울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⑤ 임시정부 불신과 아나키즘의 길
같은 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초대 요인으로 초청받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이름뿐인 정부가 될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조차 감투 싸움을 하게 될 테니.”
그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회영은 “국가보다 인간의 자유가 먼저”라는 신념을 굳혔다. 그는 상하이·베이징·요동 등지를 오가며 동방무정부주의연맹 활동에 참여했고, 박열·유자명 등과 교류하며 ‘지도자 없는 혁명, 권력 없는 정의’를 외쳤다. 그의 아나키즘은 혼란이 아닌 도덕적 평등의 철학이었다. 그는 “모든 권력은 또 다른 속박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⑥ 다롄 체포와 순국
1932년, 그는 중국 다롄에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된다. 당시 그는 위조 여권으로 이동 중이었으며, 일본 경찰은 그를 “국제적 불령선인”으로 분류했다. 뤼순감옥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4일 만에 순국했다. 향년 예순여섯. 시신은 가족에게조차 돌아오지 못했고, 묘소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기록은 없지만, 동지들은 이렇게 남겼다.
“그는 고문보다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했다.”
⑦ 근대사적 의의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귀족 가문 전체를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집안이었다. 그들의 재산은 조국의 학교가 되었고, 그들의 목숨은 독립의 씨앗이 되었다. 이회영은 귀족의 피로 태어났으나, 평등의 피로 죽었다. 그의 사상은 한국 아나키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으며, 그 형제들의 희생은 “가문 단위의 순국” 으로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사례로 기록된다.
⑧ 오늘의 시사점
이회영 일가의 역사는 부귀를 버린 사람들이 남긴 가장 고귀한 유산이다. 그들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양심의 자유 선언이었다.
“조국을 위해 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다.”
⑨ 다온의 한줄 정리
“한 가문이 사라져 나라가 다시 태어났다. 이회영과 형제들은 조선의 마지막 귀족이자, 최초의 시민이었다.”
⑩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이회영」
『이회영과 여섯 형제들』(민음사, 2019)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의 독립운동』(독립기념관, 2016)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안재성, 2001)
『근대 한국 명문가의 몰락과 정신』(서울대출판부, 2021)
'국혼(國魂)을 살린 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17편 김좌진 — 청산리의 백야, 독립군의 영혼 (0) | 2025.11.19 |
|---|---|
| 제16편 이시영 — 형제의 뜻을 끝까지 지킨 마지막 사람 (0) | 2025.11.15 |
| 제14편 윤세주 — 싸움의 끝에서 사라진 불꽃 (0) | 2025.11.11 |
| 제13편 김원봉 — 의열의 불꽃, 통합의 길로 (0) | 2025.11.09 |
| 제12편 안창호 — 성실의 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실천가 (0) | 2025.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