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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팔은 자

제15편 이용구 — 개화의 이름으로 민족을 저버린 자

by daonara 202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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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 AI 생성 이미지

 인물 개요

이용구(李容九, 1868~1912)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젊은 시절 동학(東學) 에 심취하며 평등과 자강의 이상을 품었던 인물이다. 그는 한때 농민과 백성의 삶을 구제하고 조선을 새롭게 바꾸겠다는 뜻을 지녔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 이상은 왜곡되고 만다. 동학 내부에서 그는 개화와 문명화를 주장했으나, 이후 일본 세력의 근대화를 찬양하면서외세 의존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동학에서 제명당했고, 이 사건은 훗날 손병희가 천도교로 조직을 개편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주요 활동 및 사상

동학에서 축출된 뒤 이용구는일본의 문명과 제도를 배워야 조선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에 따라1904년 송병준과 함께 일진회(一進會) 를 창립했다. 일진회는 표면적으로는 자강과 개화를 내세웠으나, 실상은 일본의 보호정책과 식민지화를 돕는 정치적 매개체로 변질되었다. 이용구는 회장으로서 일본과의 협력을 정당화하며 1909년 일본 정부에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는조선이 일본의 문명을 받아들여야만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 결과는 조선의 완전한 종속이었다. 그의 이름은 근대화의 이름을 빌린 변절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근대사적 의의

이용구의 행적은 개화의 이상이 어떻게 식민지 논리로 오염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개화파라 믿었으나, 그 개화는 민족의 자강이 아닌 제국의 논리에 기초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말년이었다. 1911년경, 그는 일본 극우 인사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는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이라 답했으나 이용구는 끝내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그가 일본의 대륙 낭인 타케타 한지(竹田半之) 에게 보낸 편지에는 깊은 후회와 자기반성이 담겨 있다.

 평생 내가 추구한 것은 사리(私利)가 아니라 대리(大利), 인민구제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속임을 당했고, 잘도 농락되었다. 2천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으로 빠뜨린 죄, 그 책임이 내게 있다.”

그는 매국노라 불러도 변명하지 않겠다며 “속았는지, 내가 바보였는지 이제는 알 수 없다고 남겼다. 이 고백은 스스로의 변절을 자인한 한 인간의 절망이자, 개화와 친일의 경계가 얼마나 가까운가를 증언하는 역사적 목소리였다.

 오늘의 시사점

이용구의 생애는진보배신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를 보여준다. 그는 현실주의를 택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존엄을 잃는 길이었다. 그가 말년에 느낀 후회는 한 개인의 회한을 넘어, “외세에 기대어 번영을 꿈꾸는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일깨운다. 오늘의 우리 또한 편리함과 발전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⑤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승리의 문명을 택했지만, 그 문명은 민족을 삼킨 쇠사슬이었다.”

⑥ 출처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일병합 100년사》, 국사편찬위원회

우치다 료헤이, 『日本之亞細亞』

이용구의 타케타 한지에게 보낸 편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구」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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