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정운복(鄭雲復, 1870~1920)은 황해도 평산 출신의 개화파 지식인으로, 근대 교육과 문명 사상을 내세웠으나 결국 일제에 협력하며 한일병합을 지지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해외 유학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배우고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지만, 그 꿈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일본 의존형 개화론’으로 변질되었다.
② 주요 활동 및 사상
정운복은 1870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하며 근대 문명과 자유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는 귀국 후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1899년 귀국 후 개화운동에 참여했지만, 그의 개혁은 점차 친일적 실용주의로 기울어갔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 흑산도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이 시기를 지나며 “조선의 근대는 일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당시 일본군의 군사적 승리를 ‘동양 문명의 새 질서’로 해석했고, 이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통감부로부터 은사금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서북학회(西北學會) 를 조직하여 겉으로는 지역 계몽과 교육 진흥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식민 정책을 합리화하는 활동을 펼쳤다. 또한 경성일보 주필로 취임해 신문 지면을 통해 한일병합을 찬양하고, 일본 통치를 ‘문명 정치’로 미화했다. 그의 글에는 ‘병합은 조선의 발전이며, 조선인은 일본의 품 안에서 번영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친일 논조가 담겨 있었다.
③ 근대사적 의의
정운복은 조선의 근대화라는 이상을 외세 의존으로 치환한 대표적 변절 지식인이다. 그는 서양의 문명을 배웠지만, 그 지식을 민족의 자강이 아니라 제국의 논리로 사용했다. 그가 주필로 있던 경성일보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문명 개화’로 포장하며 조선인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인생은 “배운 자의 변절”이라는 뼈아픈 역설을 남겼다. 지식이 깊을수록 변명은 정교해졌고, 그 정교한 논리가 식민의 굴레를 더 단단히 묶었다.
④ 오늘의 시사점
정운복의 삶은 지식이 언제나 올바름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는 조선을 구하겠다는 명분 아래 일본에 협력했고,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정신을 팔았다. 그의 행적은 “배움이 양심보다 앞설 때, 지식은 무기가 아니라 족쇄가 된다”는 역사의 경고로 남는다. 오늘의 지식인 사회에도, 정운복의 그림자는 여전히 묻어 있다.
⑤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지식으로 조선을 구하려 했지만, 그 지식은 조선을 묶는 사슬이 되었다.”
⑥ 출처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일병합 100년사》, 국사편찬위원회
《경성일보》 관련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이버 지식백과 「정운복」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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