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영휘(閔泳徽, 1852~1935)는 조선 후기의 고위 관료이자, 한일병합 이후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친일 상류층 인물이다. 그는 명성황후 민씨와 같은 여흥 민씨 일가의 방계, 즉 황실 인척 세력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 재정과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고종의 처남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명성황후의 먼 친척에 해당한다. 조선의 몰락기, 그는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결국 일본 제국의 품으로 들어갔다.
② 주요 활동 및 사상
민영휘는 19세기 말, 명문 여흥 민씨 가문의 권세를 배경으로 내무대신·탁지부대신 등 요직을 맡아 대한제국의 재정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나 국고가 기울고 정치적 신뢰가 흔들리자, 그는 황실 재정을 사유화하고 일본 측과의 재정 거래로 막대한 사재를 축적했다. 1906년, 민영휘는 ‘휘문의숙(徽文義塾)’ 을 설립했다. 겉으로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사립학교였지만, 그 설립 시점은 이미 을사늑약 직후, 일본이 통감부를 통해 조선을 장악하던 때였다. 학교명 ‘휘문(徽文)’은 자신의 이름 ‘영휘(泳徽)’에서 따온 것으로, 학교 설립은 친일 행보로 얼룩진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실제 휘문의숙은 개교 직후 통감부 인가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교과과정은 일본식 교육제도를 따랐다. 교과서와 교원 대부분이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었으며, 결국 이 학교는 식민지 교육의 예행연습장으로 기능했다. 그는 ‘근대화’라는 단어를 내세워 식민체제에 순응하는 신교육의 문을 연 셈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민영휘는 병합 찬양문을 발표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와 손잡고 토지·광산·금융업에 투자하며 식민지 재정구조의 조력자가 되었다.
③ 근대사적 의의
민영휘는 귀족 작위를 통해 식민체제에 기생한 상류층 친일파의 전형이었다. 그는 정치·경제·교육을 모두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근대화의 상징’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그의 근대화는 민족의 자강이 아닌 제국의 체제 순응이었다. 그가 세운 휘문의숙은 훗날 근대교육의 초석 중 하나로 남았지만, 그 본질은 식민 근대화의 이중성이었다. 교육을 내세워 이미지를 세탁했고, 지식을 팔아 명예를 복구하려 했지만, 그가 남긴 학교의 그림자는 여전히 제국의 색을 띠었다.
④ 오늘의 시사점
영휘의 생애는 ‘명분의 가면을 쓴 배신’ 이었다. 그는 근대화를 말했지만, 그 근대화는 스스로의 부와 지위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다. 그가 세운 학교는 문명의 등불처럼 보였지만, 그 불빛은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기 위한 세탁의 불빛이었다. 오늘의 시대에도 권력과 자본을 위해 명분을 포장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민영휘의 이름은 그 모든 ‘체제 순응의 미학’을 상징한다.
⑤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부귀를 지켰지만, 명예를 잃었고 — 결국 역사는 그를 외면했다.”
⑥ 출처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일병합 100년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 관보》, 1910~1930
《휘문학원 백년사》, 휘문고등학교, 200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네이버 지식백과 「민영휘」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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