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언론인·소설가·관료·정치가로 활동했던 대표적 친일 지식인이다. 그는 신문과 문학이라는 근대의 언어를 누구보다 빨리 익혔지만, 결국 그 언어를 제국의 논리를 전파하는 도구로 바꾸었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학문을 배우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점차 일본 제국의 세력에 기대어 이완용의 비서 겸 정치적 후원자 관계로 들어가며 친일 노선을 뚜렷이 드러냈다.
② 주요 활동 및 사상
이인직은 186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학문에 관심을 보였다. 1880년대 일본에 유학하여 근대 정치와 신문학을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의 초기 근대언론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처음엔 개화사상과 민권운동에 호의적이었지만,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자 급격히 현실주의로 기울었다. 이 시기 그는 이완용의 측근 비서로 들어가 정치 실무를 맡았고, 그의 재정적·정치적 후원을 받아 1906년 〈대한신문〉 을 창간했다. 하지만 그 신문은 독립의 의지를 고취하기는커녕 일본의 보호정책을 찬양하고, 을사오적과 통감부의 정책을 대변하는 친일 선전지로 변질됐다. 이인직은 그 논설에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 아래 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라 주장하며, 국민의 분노를 ‘문명론’으로 덮어버렸다. 또한 문학가로서 발표한 〈혈의 누〉(1906), 〈은세계〉(1908) 는 한국 근대문학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윤리와 서양 문명 숭배가 뒤섞여 있었다. 즉, 그는 새로운 문학의 형식을 빌려 식민근대의 사상을 미화한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이후 그는 일본의 신임을 받아 내부차관, 중추원 참의로 승진했고, 이완용 내각의 실무 라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③ 근대사적 의의
이인직은 ‘근대 지식인의 타락’을 상징한다. 그는 처음엔 개혁가였고, 언론의 자유를 외쳤지만, 결국 권력의 냄새에 취해 그 펜을 매국의 도구로 바꿨다. 그의 글은 식민지 조선을 “일본 덕분에 문명화된 나라”로 포장했고, 그의 언론은 총칼보다 더 은밀하게 민족의 사상을 무너뜨렸다. 문학을 통해 독립정신을 일깨운 이광수, 최남선 등이 있었다면, 이인직은 문학을 이용해 제국의 질서를 합리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 불렀지만, 역사는 그를 ‘권력의 대필자’로 기록했다.
④ 오늘의 시사점
이인직의 생애는 지식의 윤리가 무너질 때, 역사가 얼마나 잔혹해지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을 ‘문명화의 길’이라 포장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식인으로 남기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의 행간은 자주를 포기한 지식인의 비겁함으로 얼룩져 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진실을 팔아 권력에 복무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그림자에도 이인직의 이름이 겹쳐진다.
⑤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글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끝내 글로 자신의 양심을 무너뜨렸다.”
⑥ 출처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인직 연구》, 김윤식, 서울대학교출판부, 1983
《신문으로 읽는 근대의 풍경》, 한성일, 20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직」 항목
《한일병합 100년사》,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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