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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21편 이재명 — 명동의 칼, 조선의 마지막 의기(義氣)

by daonara 202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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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근처 이재명의사 의거터비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조선을 위해 칼을 든 23세의 청년, 이재명(李在明, 1887~1910). 평양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었으나, 1905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고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공립협회 LA 지방회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했고, 독립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는 것임을 깨달았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는 매국노 처단을 결의했고, 그 순간 이재명은 손을 들었다. “제가 이완용을 맡겠습니다.” 스물한 살 청년의 손끝에서 조선의 분노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하와이에서 시작된 독립의 씨앗조직이 맡긴 임무

공립협회는 개인적 의분이 아닌 해외 독립조직이 공식 승인한 작전으로서의 의거를 추진했다. 처단 대상은 두 명. 1: 이완용, 2: 이용구(일진회). 이재명은 스스로 이완용을 맡았다. 이것은 우발적 복수가 아니라 해외–국내 독립운동을 잇는 전략적 행동이었다. 그는 귀국해 2년 동안 이완용의 동선을 추적하며 완벽한 거사를 준비한다.

 왜 명동인가추도식 기사, 동선 분석, 그리고 결단

1909 12, 신문에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식이 명동성당에서 열린다는 보도가 나왔다.이완용이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도 뒤따랐다. 이재명은 이때 직감했다. “역적이 반드시 나타나는 날이다.” 정동 관저와 명동 일대가 그의 일상 동선이었다. 이재명은 이를 2년간 관찰하며 확인했다. 정오 무렵 경비가 가장 느슨함. 군중이 많아 돌진이 용이함. 일직선 좁은 길목 = 성공 확률 최댓값, 경호 동선이 단순함. 그리고 그는 군밤장수로 위장해 군밤통 아래 칼을 숨겼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러나 이 칼은 조선을 살릴 것이다.”

 명동 의거칼은 역적을 향했고, 비극은 민초에게 닿았다

1909 12 22.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이동하던 순간, 이재명은 군밤장수 행세를 하며 뛰어들었다.

“역적이로다!”

칼은 이완용의 목을 깊이 베었고 두 번째 칼은 가슴을 찔렀다. 이완용은 인력거꾼 뒤로 숨으며 살아남았다. 반면 인력거꾼은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일부는무고한 인력거꾼이 희생됐다고 말하지만 여러 기록에서 그는 단순 인력거꾼이 아닌 이완용이 평소 데리고 다니던 경호원이었음이 드러난다. 총리대신이 길에서 아무 인력거를 잡아 타는 일은 당시엔 거의 없었다. 칼의 방향은 흔들린 적 없었다. 역적을 감싼 구조가 비극을 만들었을 뿐이다.

⑤ 최후 진술 — 2,000만 동포와 함께 선 의기(義氣)

체포된 이재명에게 일본 경찰이 물었다.

“공범이 있느냐?”

그는 단호했다.

“이런 큰일에 무슨 공범이 필요하오. 공범이 있다면 2천만 동포 모두가 나의 공범이오.”

재판에서도 일본인 판사 스가하라는 물었다.

“누가 너를 도왔는가?”

그는 흔들림 없이 답했다.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이는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다. 방조자는 없다.”

그리고 그는 재판정 한복판에서 이완용의 죄목을 또렷하게 낭독했다. 그날 법정은 일본의 법정이 아니라 조선의 단죄의 자리였다.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말했다.

“공평치 못한 법으로 내 목숨은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충혼과 의혼은 빼앗지 못한다.”

그리고 교수형을 앞두고 남긴 조선의 마지막 의기가 있었다.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이것이 23세 청년이 남긴 조선의 마지막 분노였다.

 근대사적 의의조선이 무너진 뒤 첫 번째로 칼을 든 사람

이재명 의거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해외 독립운동과 국내 투쟁을 공식적으로 연결한 첫 사례 공립협회가 해외에서 결의하고, 국내에서 실행한 최초의 조직적 항일 처단 작전이었다.

★“민족의 적은 반드시 단죄된다는 정치적 메시지

경술국치 직전,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조선의 청년이 칼을 들었다는 사실은 민중에게 강력한 정신적 불씨가 되었다. 내부 매국노를 겨냥한 의식적 투쟁. 이는 독립운동이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구조적 배신을 향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저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유언은 독립운동 정신의 핵심 유산 그의 최후 진술은 후대 무장·의열 투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이재명은 실패한 암살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정신적 문을 연 저항의 첫 불꽃이었다.

순국조선총독부 출범 하루 전, 끊지 못한 불꽃

1910 9 30. 경술국치 한 달 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기 단 하루 전. 일본은 조선의 마지막 의기를 자신들의 지배 시작과 동시에 지우려 했다. 이재명은 23세로 교수형을 당했다.

■ 이완용의 17년 고통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날 받은 상처로 17년 동안 폐렴을 달고 살다 1926년 병으로 사망했다. 칼은 한 번이었지만 상처는 그의 남은 생 전체를 흔들었다.

■ 아내 오인성

재판정에서 “이완용이 살아 있는데 왜 내 남편이 죽어야 하느냐며 울부짖던 아내 오인성은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교사로 살다 3·1운동 직후 세상을 떠났다. 이재명은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까지 독립운동 속에 남겨두고 떠났다.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한 번 죽었으나, 그의 분노는 수십만 번 다시 깨어나 조선을 다시 일으켰다."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가 이재명〉

 네이버 블로그해양하늘의 역사공간

「이재명 의사 의거 및 사형 사례」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손성진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단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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