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불교 승려이자 사상가, 시인이었다. 백담사에서 출가해 오세암과 영처사에서 수행했으며, 이후 ‘만해(萬海)’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의 인생은 단순한 수도의 길이 아니라, 조국과 신앙을 함께 구하려는 ‘행동하는 수행’이었다.
② 불교개혁과 유신론 — 신앙을 혁명으로 바꾸다
그는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해 “불교는 현실을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 불교계는 일제의 ‘사찰령’으로 주지 임명권이 박탈되고 총독부의 관리하에 놓인 상태였다. 한용운은 이를 “불교의 자주성을 빼앗은 영혼의 식민지화”라 비판했다.
“부처는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 세상을 고치려 했다.”
그에게 불교의 자비는 순종이 아니라 저항의 다른 이름이었다.
③ 친일 불교 비판 — 종교의 자주성을 지키다
그는 일본불교와 손잡고 천황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조선 승려들을 향해 “그들은 부처를 팔아 밥을 짓는 자들이다.”라며 통렬히 꾸짖었다. 한용운에게 종교의 변절은 곧 민족의 변절이었다. 그는 불교가 다시 민족의 혼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찰령 반대운동과 불교 청년계몽운동을 주도했다.
“칼로 나라를 빼앗은 자보다, 마음을 빼앗는 자가 더 두렵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한 법문이 아니라, 일제 불교 정책과 친일 승려들을 향한 정의의 포효였다.
④ 3·1운동의 선봉 — 정신의 독립을 행동으로
1919년,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는 선언서 인쇄와 배포를 직접 지휘했으며, 체포된 뒤 법정에서 “조선 독립은 하늘의 뜻”이라 외쳤다. 그는 무력보다 정신의 힘을 믿었으나, 그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마음의 투사’였다.
“나라의 독립은 무력보다 먼저 정신의 독립에서 시작된다.”
⑤ ‘님의 침묵’ — 저항의 시, 영혼의 독립선언
출옥 후 그는 불교와 문학을 잇는 저항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했다. 이 시집은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님’을 잃은 조국을 향한 절규이자, “정신의 독립 없이는 육체의 독립도 없다”는 선언이었다.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 《님의 침묵》 중
⑥ 행동하는 자비 — 비폭력 아닌 저항
한용운은 비폭력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자비는 악을 외면하는 평화가 아니라, 불의에 맞서는 의로운 분노였다. 그는 “참선이란 고요히 앉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고통을 껴안는 일”이라 말했다. 그에게 정신의 독립은 내면의 자유였고, 행동하는 자비는 그 자유를 지키는 실천이었다. 불교는 그의 손에서 도피가 아닌 혁명이 되었다.
⑦ 마지막 길 — 해방을 보지 못한 독립의 시인
해방을 두 해 앞둔 1944년, 그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다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청년들이 몰려와 “님은 갔지만, 님의 뜻은 남았다”고 읊조렸다.
⑧ 근대사적 의의
한용운은 종교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정신적 저항가’이자 ‘도덕적 혁명가’였다. 그는 정신의 독립을 설파하며 마음의 혁명을 일으켰고, 행동하는 자비로 그 사상을 현실 속에서 실천했다. 그의 생애는 ‘사상의 불꽃’이 ‘행동의 불꽃’으로 번진 20세기 조선 지식인의 새로운 전형이었다.
⑨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마음으로 싸우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⑩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한용운」
독립기념관 인물DB
《조선불교유신론》(1913)
《님의 침묵》(19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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