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청년 의사로,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로 세계를 놀라게 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으로,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의 형편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민족의식과 자주정신을 키워 나갔다.
그는 농촌계몽운동과 청년 교육에 힘썼고,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제3함대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등을 처단하였다.
② 3·1운동의 충격
1919년 3월, 예산에서도 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윤봉길은 일본 헌병의 총칼 아래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직접 보았다. 그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했고,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에 들어가 한학과 민족사를 공부했다.
③ 월진회의 탄생
어느 날 윤봉길은 고향 예산의 한 농부가 조상 묘를 찾지 못해 헤매는 장면을 목격했다. 묘비의 글자를 읽지 못한 농부는 끝내 어느 묘가 자기 조상의 것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그날 밤 윤봉길은 일기에 적었다.
“글을 모르면 조상의 뼈도 찾지 못한다.”
그는 월진회(越進會) 를 창립했다. ‘한 걸음이라도 앞서자’는 뜻을 가진 이 단체는 문맹퇴치, 절약, 근면, 자주정신을 가르치는 청년 계몽운동이자 훗날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④ 광주학생운동과 결단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굴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교육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벽에 부딪혔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식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그날 이후 그는 행동으로 싸워야 한다고 결심했다.
⑤ 장부출가생불환 — 돌아오지 않는 길
1930년 겨울, 윤봉길은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장부가 뜻을 품고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월진회에서 빌린 돈을 갚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품팔이를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마침내 상하이를 향해 떠났다. 그의 수첩에는 이 글자가 남았다.
“丈夫出家 生不還.” — 사내가 뜻을 품고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⑥ 만주사변 — “조국을 위해 죽을 자리마저 없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는 조선 독립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그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일기에 적었다.
“만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으니, 이제 조국을 위해 죽을 자리조차 남지 않았다.”
그에게 만주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숨쉴 수 있는 마지막 하늘이었다. 그 절망은 오히려 결단으로 바뀌었다.
⑦ 한인애국단 입단 — 김구와의 만남
1932년,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는 김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에게 죽음을 맡겨 주십시오.”
그의 결의에 김구는 깊이 감동했고, 윤봉길은 곧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질 준비를 마쳤다.
⑧ 시계의 약속 — “제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의거 전날, 윤봉길은 김구에게 새로 산 시계를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 제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계를 선생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후일 나라를 지키고, 지하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 시계는 지금도 백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⑨ 홍커우 공원 의거 — 도시락 속의 조국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과 전승기념식이 겹친 날.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는 일본의 고위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품고 그 자리에 섰다. 그가 던진 폭탄은 일본군 장성과 고관들을 즉사시켰고, 상하이의 하늘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는 곧 체포되었으나 두려움 없이 고개를 들었다.
⑩ 체포와 최후 — 의연한 청년의 죽음
윤봉길은 항저우 일본군 주둔지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을 선고받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조선의 독립군이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싸웠다.”
총성이 울렸고, 시신은 쓰레기장 입구에 버려졌다. 그러나 훗날 동포들이 유해를 찾아 예산 충의사에 모셨다.
⑪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는다. 너희들은 아버지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아라. 너희들이 장차 어른이 되어 사람다운 사람, 참된 조선 사람이 되어라. 너희 어머니를 잘 모시고, 맹자도 에디슨도 다 어진 어머니 밑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너희들도 어머니를 잘 받들어라.” — 1932년 4월, 상하이 감옥에서 두 아들에게
⑫ 의거의 파장 —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 의거 소식을 들은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 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그 한마디가 중국 전역을 흔들었다. 그날 이후 중국의 시선은 조선을 향했고,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보복도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는 피신해야 했고,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었지만, 그의 결의는 ‘죽음으로 나라를 살린 불꽃’ 으로 남았다.
⑬ 다온의 한줄 정리
그의 결의는 조국을 일으켰고, 세계의 양심을 깨웠다.
⑭ 출처
독립기념관, 국가보훈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매헌 윤봉길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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