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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20편 조소앙 — 사상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

by daonara 2025.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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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동상 - AI 재생성 이미지

 인물 개요

조소앙(趙素昻, 1887~1958), 본명 조용은(趙鏞殷).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충신 조려(趙旅) 17대손이다. 조려는 단종 복위 실패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신하는 임금을 두 번 섬기지 않는다고 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그의 절의는 세대를 건너 사상의 유전처럼 조소앙에게 전해졌다.  칼로 충을 지키던 시대는 갔다. 이제는 사상으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 조소앙은 무기를 든 충절이 아닌 정의를 세우는 사상으로 나라를 구하려 했던 근대 지식인의 초상이었다.

 일본 유학과 사상의 각성

1904, 그는 근대 법과 문명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양 헌정주의와 자유민권사상을 익히며 ‘정치의 근본은 권력이 아니라 정의라는 신념을 세웠다. 1908, 일본 내 한인 유학생 조직인 대한총학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확산되던 한일합병론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단기 구류되었지만 그 경험은 오히려 그의 사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옥중에서총칼로 얻은 질서는 진정한 문명이 아니다.”라고 쓰며 유교의 도덕,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 서양의 자유와 평등 사상을 함께 아우르는 새로운 철학을 모색했다. 이때 싹튼인간의 평등정의로운 국가의 개념은 훗날 그가 세운 삼균주의(三均主義) 의 사상적 뿌리가 된다.

중국 망명과 독립 외교의 길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조소앙은 “문명은 인류를 구해야지, 인류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을 떠나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국제정세와 사회사상을 연구하며 ‘한국 독립은 무력만이 아니라 국제 여론의 정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무력은 국경을 넘지 못하지만, 사상은 세계를 움직인다.”

 파리강화회의와 제네바 만국사회당대회

1919 1,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이 한국 대표로 파견되었을 때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외교문서 작성과 지원을 담당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외교적 논리를 세우며 ‘한국의 독립은 인류 정의의 연장선임을 강조했다. 같은 해 8,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차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직접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조소앙은 이렇게 연설했다.

 한국의 독립은 아시아의 정의이며, 정의는 인류의 평화를 세운다.”

그의 연설은 대표단들의 호응을 얻었고, 회의는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공식 채택했다. 이는 한국 독립이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승인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삼균주의(三均主義)와 건국강령

1920년대 들어 조소앙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둥으로 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 를 체계화했다. 그는 이를 단순한 정치 이념이 아닌새로운 인간관으로 설명했다.

 모든 인간은 인격이 균등하고, 모든 국민은 권리가 균등하며, 모든 나라는 국제적으로 균등하다.”

1941, 그는 이 사상을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 을 직접 집필했다. 이 강령은 훗날 제헌헌법의 기본 정신으로 계승되며,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에 남은 ‘정치·경제·사회적 균등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임시정부와 대일 선전포고

조소앙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 초기부터 참여해 외교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외무부장(외교부장) 으로 활동했다. 그는 무장투쟁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독립의 최종 무대는 총이 아니라 외교의 테이블이라며 국제 여론전을 중심으로 한 외교 독립론을 전개했다. 1941 12,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대독 선전포고문을 기초하고 서명했다. 그 문장에는 조소앙 특유의 이성적 열정이 담겨 있었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일본의 패망이 아니라 정의의 승리를 위한 인류의 혁명이다.”

이 선전포고는 임시정부가 국제전의 일원으로서 연합국과의 연대를 공식화한 역사적 선언이었다.그는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작성하며 “전쟁이 끝나면 새 문명은 균등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복 이후의 귀국과 좌절

광복의 순간, 조소앙은 누구보다 감격했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조국은독립된 나라가 아니라이념으로 갈라진 또 다른 전장이었다. 1945 11월 귀국한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소 냉전의 흐름 속에서 그의중도 민족통일론은 힘을 얻지 못했다. 좌우 모두에게 이상주의자로 보였고, 그의 삼균주의는 현실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정의의 길은 느리지만, 언젠가 모든 길이 그리로 모일 것이다.”

 납북과 최후

1948년 남북 분단이 굳어지던 시기, 조소앙은통일 없이는 독립도 없다는 신념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그 후 평양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사망 연도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1958년 무렵, 북에서 조용히 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은 남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하나의 대한민국의 이상으로 남았다.

 근대사적 의의

조소앙은사상가이자 외교가, 무력보다 정의, 이념보다 인간을 믿은 인물이었다. 그의 삼균주의는 단지 정치이론이 아니라 인간 존엄과 평등을 근본으로 한 한국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초였다. 그가 남긴 사상은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의 문장 속에 살아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⑩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무력으로 싸우지 않았지만, 사상으로 나라를 세웠다.”

⑪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조소앙」

독립기념관 인물DB

『삼균주의 연구』(한국사학회, 2016)

『조소앙 평전사상으로 독립을 꿈꾼 사람』(2020, 역사비평사)

『대한민국 건국강령』 원문 (1941, 임시정부 문서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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