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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24편 이봉창 — 도쿄 한복판에 던진 정의의 폭탄

by daonara 20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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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이봉창 동상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서울 용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일제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의열투사이다. 그는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문창학교 4년 과정을 수료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과자점 점원, 용산역의 역부로 일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으나, 그곳에서 그는 진정한조선인 차별을 체감했다. 여관에서는 숙박을 거절당했고, 식당에서는 식기가 따로 주어졌으며, 길을 가다 일본인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일본인 행세를 했다. 수준급의 일본어를 구사하고 의식적으로 일본인의 행동을 쫓으며 그들의 습성을 몸에 익혀 정말 일본인과 다름없었다. 이런 일본인 행세를 한 덕분에 이봉창은 일왕에서 수류탄을 던질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독립운동가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구와의 만남

1931, 이봉창은 도쿄에서 신문을 통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가슴속에서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그는 가진 돈을 모아 상하이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백범 김구를 만났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대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마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에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1931 12 1931 12 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런 후 수류탄을 양 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하였다.

그 후 도쿄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구랍 28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의 보도를 통하여 1 8일 관병식이 거행됨을 알고 상해의 김구에게 ‘물품은 1 8일 방매하겠음’이라는 암호전문을 보냄으로써 거사 계획을 알렸다 1 6일에는 대대목(代代木) 연병장에서 벌어지는 예행연습을 구경하기 위해 외출하여 어느 버스운전사에게서 관병식에 배관(拜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는데, 그로부터 ‘동경헌병대본부육군헌병조장 대장전규(曹長 大場全奎)’라는 명함을 얻어서 검문·검색을 여러 번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1 8일 아침 도쿄의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고 도열해 있다가 관병식을 마치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황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고 폭탄의 위력이 크지 못해 천황을 폭살하지는 못했다. 실패한 이유는 거리도 거리거니와 천황이 탄 마차를 잘못 알고 던졌기 때문이었다.

일본 경찰은 현장에서 그를 체포했다. 기자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또렷이 말했다.

 나는 조선 사람, 이봉창이다.”

 재판과 죽음조선인으로 죽기를 택하다

1932 9 30, 일본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는 이봉창에게대역죄(大逆罪)’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같은 해 10 10, 그는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향년 31세였다. 그의 유해는 사이타마현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은 시신의 행방을 비밀에 부쳤고,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신문에서조차 삭제됐다.

그러나 해방 후 김구는 박열 등에게 부탁해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발굴을 추진했다. 1946 7, 세 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봉환되어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④ 김구의 회고 — “하늘이 내린 사명

백범 김구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가 조선의 청년으로서 이렇게 맑은 눈빛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조국을 위해 죽음을 구걸하던 청년이었다.”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한 암살이 아니라, “조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세상에 알린 사건이었다. 그의 의거는 이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의거로 이어졌고, 그 두 폭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⑤ 근대사적 의의

이봉창 의사의 도쿄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무기보다 양심이 강한 민족의 선언이었다. 그는조선인도 황제를 겨눌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했다. 그의 한 몸이 던진 폭탄은 일본 제국의 심장을 울렸고, 침묵하던 세계를 깨웠다. 그는 죽었지만, 그 이름은 조국의 자존심이 되었다.

⑥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죽음을 던져, 조국의 이름을 되찾았다.”

⑦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이봉창 의사」

독립기념관 인물DB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

『백범일지』 김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독립운동사 디지털 아카이브

한민족독립운동사-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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