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내 소원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 『백범일지』 「나의 소원」
① 인물 개요
김구(金九, 1876~1949)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은 지도자였다. 호는 백범(白凡)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의병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탈옥에 성공하였다.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광복 이후에도 분단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통일과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의 생애는 『백범일지』라는 자서전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것은 한 인간의 고백이자 한 민족의 기록이다.
② 치하포 사건 — 정의의 불씨가 된 피의 밤
김구의 이름은 처음부터 ‘백범(白凡)’이 아니었다. 그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창수, 가난하지만 선비의 기개를 품은 청년이었다. 나라의 주권이 조금씩 무너지고, 일본인들의 횡포가 노골화되던 1890년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시해된 그해 겨울, 스무 살의 김창수는 분노와 수치 속에 세상을 등졌다. 1896년 여름, 황해도 치하포. 그곳에서 김창수는 일본인 쓰치다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는 “우리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았다”고 당당히 자백했다. 그날 밤이 훗날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첫 장이 되었다. 체포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라의 죄인이 아니다”라며 죽음을 거부하고 탈옥했다. 그 대가로 부모가 대신 잡혀갔고, 아버지는 옥에서 고문과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부터 김창수는 깨달았다. 칼로 원수를 갚는 것보다 더 큰 싸움은 정의의 이름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그는 분노의 청년에서 신념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이 치하포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정의의 불씨’가 된 첫 장이었다.
③ 옥살이와 탈옥 — 분노가 신념으로 바뀌다
탈옥 후 그는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무너진 국운 속에서도 사람들에게“나라가 없으면 집도 없다. 백성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때부터 그는 이름 대신 ‘백범(白凡)’이라 불렸다. ‘흰 범부’, 즉 ‘평범한 백성 중의 하나’라는 뜻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 속에 겸손과 결의를 함께 새겼다.
④ 임시정부와 광복군 — 혼란 속의 중심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김구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행정과 조직을 맡아 정부의 뼈대를 세웠고, “독립은 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얻는다”는 믿음 아래 무장투쟁의 길을 택했다. 1920년대 임시정부는 내분과 재정난으로 흔들렸다. 이승만의 외교노선, 김원봉의 사회주의 노선 등 여러 갈래의 사상 충돌 속에서 김구는 “누가 옳은가보다, 누가 조국을 더 사랑하는가”를 기준으로 사람을 품었다. 그의 정치철학은 단순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과 윤봉길 같은 청년들에게 조국의 희망을 걸었다.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이 상하이를 울렸을 때, 장제스는 “중국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김구는 단순한 망명 지도자가 아니라 한 민족의 정신적 대표가 되었다. 1940년,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했다. 김구는 “조국의 군대 없는 독립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며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고, 연합군과 협력해 일본 본토 공습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늘 말했다. “우리는 일본을 미워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정의를 위해 싸운다.” 그의 전쟁은 총보다 양심의 싸움이었다.
⑤ 해방 —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 독립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그러나 김구의 얼굴에는 웃음보다 허탈한 고요가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했고,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아니라‘개인 자격 귀국자’로 기록되었다. 그는 경교장에 머물며 이렇게 썼다.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주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백성의 마음에 조국이 없으면, 그 나라는 아직 독립이 아니다.”
독립운동의 동지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고, 그가 세운 임시정부도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때 김구는 또다시 싸움을 결심한다. 이번엔 총이 아니라, 분단의 운명과 싸우는 길이었다.
⑥ 분단을 막으려 한 마지막 시도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그는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과의 남북연석회의에서 “우리에게는 좌우가 없고, 오직 조국만 있다”고 말했다. 남에서는 ‘빨갱이와 손잡았다’는 비난이, 북에서는 ‘이용 가치가 없는 민족주의자’라는 냉대가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원한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권력의 자리를 거부하고 끝까지 하나의 조국을 꿈꾼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⑦ 경교장의 새벽 — 끝까지 싸운 사람
1949년 6월 26일 새벽, 경교장 응접실. 한 발의 총성이 그의 생을 멈췄다. 그날 새벽, 김구는 또다시 남북 협상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한 청년은 울면서 말했다. “그분은 독립을 넘어서 인간의 양심을 지키던 분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해방된 조국은 여전히 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효창공원에 잠든 김구의 묘비에는 ‘백범 김구 지하에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바람처럼 ‘지상에 완전한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⑧ 근대사적 의의
김구는 총보다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정치적 실패 속에서도 “정의의 나라, 아름다운 나라”를 꿈꿨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도덕의 정치학이었다. 그는 말했다.
“정치란 권력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일이다.”
그의 일생은 싸움이 아니라 기도였다. 치하포의 분노가 기도가 되었고, 임시정부의 혼란이 믿음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의 고독이 양심이 되었다.
⑨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총으로 싸운 마지막 의병이자, 양심으로 싸운 첫 정치인이었다.”
⑩ 출처
『백범일지』 (김구 자서전)
국가보훈부 공훈록 「백범 김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DB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사료총서』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경교장기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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