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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팔은 자

제25편 김활란 — 여성 교육의 전사인가, 체제의 협력자인가

by daonara 2025.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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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몽을 주장한 친일의 앞잡이?!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은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개척자이자, 동시에 일제강점기 전시체제에 협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학감·교장을 지내며 수많은 여성 지식인을 길러냈지만, 193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제국에 협력한 기록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주요 활동 및 사상

김활란은 인천 출생으로,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미국 웨슬리언대학과 보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해 여성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한 교육을 추진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그녀의 행보는 달라졌다. 그녀는 애국금차회 발기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애국자녀단 조직 지도자로 참여하여 조선 여성과 학생들을 전시체제에 동원했다. 그녀는 연설에서여성도 황국신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고, 전쟁터로 나가는 학생들에게성전(聖戰)의 사명을 강조했다. 이러한 행적은 단순한 생존의 선택이 아니라 제국주의 이념에 협력한 지도자의 행동으로 기록되었다.

애국자녀단과 전시 동원 논란

김활란이 주도한 애국자녀단은 명목상으로는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게 보호하겠다는 단체였으나, 실제로는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전쟁 물자 생산, 군 위문, 헌금 활동 등을 수행했다. 이화여전 학생들은 군수공장 봉사, 위문품 제작, 위문편지 작성 등 일본군 지원 활동에 동원되었다. 따라서 학계는 김활란을정신대 직접 모집자라기보다, 정신대 체제를 정당화한 교육자적 협력자로 본다. 그녀는 총을 들지 않았지만, 총이 향하는 방향을 정당화하는 말과 글을 남겼다.

 해방 이후이화여대의 변호와 역사적 책임

해방 후 김활란은 미군정 고문, 유엔총회 한국대표 등을 지내며 오히려 사회적 명망을 되찾았다.이화여대 또한그녀의 협력은 학교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공식적으로 옹호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친일문제 재조명 속에서 그 변호는기독교 여성 엘리트의 자기합리화로 평가받았다. 이화여대 내부에서도김활란의 행적은 반성 없이 미화되었다는 공식 입장이 발표되며, 그녀의 동상 이전 및 명예 철회 논의가 이어졌다.

 결론김활란이라는 이름의 두 얼굴

김활란은 선구자였지만, 동시에 체제의 협력자였다. 그녀는 여성 교육의 길을 열었지만, 그 길을 제국의 질서 안에서만 허락했다. 기독교 신앙을 내세웠지만, 신앙의 양심보다 권력의 이익을 택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자신의 선택을 반성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 여성 교육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문으로 제국의 깃발을 들여왔다. 그녀는 신앙과 지식으로 민족을 가르쳤지만, 권력의 그림자로 그 빛을 덮었다.

⑥ 다온의 한줄 정리

“그녀는 여성 교육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문으로 제국의 깃발을 들여왔다.”

⑦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여성과 제국》, 강정숙, 역사비평사, 2013

《김활란의 생애와 시대》, 장영숙, 2015

한겨레·경향신문·여성신문 (2024 4월 관련 보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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