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47 제23편 윤봉길 —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난 청년 ① 인물 개요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청년 의사로,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로 세계를 놀라게 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으로,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의 형편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민족의식과 자주정신을 키워 나갔다.그는 농촌계몽운동과 청년 교육에 힘썼고,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제3함대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등을 처단하였다.② 3·1운동의 충격1919년 3월, 예산에서도 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2025. 12. 15. 제22편 이인직 — 펜으로 나라를 팔고, 권력의 그림자 속에 글을 쓴 사나이 ① 인물 개요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언론인·소설가·관료·정치가로 활동했던 대표적 친일 지식인이다. 그는 신문과 문학이라는 근대의 언어를 누구보다 빨리 익혔지만, 결국 그 언어를 제국의 논리를 전파하는 도구로 바꾸었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학문을 배우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점차 일본 제국의 세력에 기대어 이완용의 비서 겸 정치적 후원자 관계로 들어가며 친일 노선을 뚜렷이 드러냈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이인직은 186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학문에 관심을 보였다. 1880년대 일본에 유학하여 근대 정치와 신문학을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독립신문, 제국신문.. 2025. 12. 5. 제22편 한용운 — 마음으로 싸운 혁명승, ‘님의 침묵’의 주인공 ① 인물 개요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불교 승려이자 사상가, 시인이었다. 백담사에서 출가해 오세암과 영처사에서 수행했으며, 이후 ‘만해(萬海)’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의 인생은 단순한 수도의 길이 아니라, 조국과 신앙을 함께 구하려는 ‘행동하는 수행’이었다.② 불교개혁과 유신론 — 신앙을 혁명으로 바꾸다그는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해 “불교는 현실을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 불교계는 일제의 ‘사찰령’으로 주지 임명권이 박탈되고 총독부의 관리하에 놓인 상태였다. 한용운은 이를 “불교의 자주성을 빼앗은 영혼의 식민지화”라 비판했다. “부처는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 세상을 고치려 했다.”그에게 불교의 자비는 순종이 아니라 저항의 다른 이름이었다.③ 친일 불.. 2025. 12. 2. 제21편 이재명 — 명동의 칼, 조선의 마지막 의기(義氣) ① 인물 개요 조선을 위해 칼을 든 23세의 청년, 이재명(李在明, 1887~1910). 평양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었으나, 1905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고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공립협회 LA 지방회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했고, 독립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는 것임을 깨달았다.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는 매국노 처단을 결의했고, 그 순간 이재명은 손을 들었다. “제가 이완용을 맡겠습니다.” 스물한 살 청년의 손끝에서 조선의 분노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② 하와이에서 시작된 독립의 씨앗 — 조직이 맡긴 임무공립협회는 개인적 의분이 아닌 해외 독립조직이 공식 승인한 작전으로서의 의거를 추진했다. 처단 대상은 두.. 2025. 11. 27. 제21편 민영휘 —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버린 귀족 ① 인물 개요영휘(閔泳徽, 1852~1935)는 조선 후기의 고위 관료이자, 한일병합 이후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친일 상류층 인물이다. 그는 명성황후 민씨와 같은 여흥 민씨 일가의 방계, 즉 황실 인척 세력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 재정과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고종의 처남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명성황후의 먼 친척에 해당한다. 조선의 몰락기, 그는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결국 일본 제국의 품으로 들어갔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민영휘는 19세기 말, 명문 여흥 민씨 가문의 권세를 배경으로 내무대신·탁지부대신 등 요직을 맡아 대한제국의 재정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나 국고가 기울고 정치적 신뢰가 흔들리자, 그는 황실 재정을 사유화하고 일본 측과의 재정 거래로 막대한 사재를 축적했다. 19.. 2025. 11. 26. 제20편 조소앙 — 사상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 ① 인물 개요조소앙(趙素昻, 1887~1958), 본명 조용은(趙鏞殷).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충신 조려(趙旅) 의 17대손이다. 조려는 단종 복위 실패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신하는 임금을 두 번 섬기지 않는다”고 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그의 절의는 세대를 건너 사상의 유전처럼 조소앙에게 전해졌다. “칼로 충을 지키던 시대는 갔다. 이제는 사상으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 조소앙은 무기를 든 충절이 아닌 정의를 세우는 사상으로 나라를 구하려 했던 근대 지식인의 초상이었다.② 일본 유학과 사상의 각성1904년, 그는 근대 법과 문명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양 헌정주의와 자유민권사상을 익히며 ‘정치의 근본은 권력이 아니라 정의’라는 신념을 세웠.. 2025. 11. 25. 이전 1 2 3 4 ··· 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