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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팔은 자

제11편 송병준 — 변절의 설계자, 일진회의 얼굴

by daonara 2025.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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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 AI 생성 이미지

 인물 개요

송병준(宋炳濬, 1858~1925)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본관은 은진이다. 부친은 율학훈도 송문수이며, 어린 시절 서얼 신분의 차별을 받았으나 재능과 야심으로 관직에 올랐다. 1871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참군,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구로다 기요타카 일행을 접대하면서 일본 세력과 인연을 맺었다. 이때부터 송병준의 인생은 조선이 아닌 일본을 향하게 된다.

주요 행적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며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긴 그는 1886년 일본에서 김옥균 암살 밀명을 받았다. 그러나 실행 대신 김옥균과 가까워져 귀국 후 통모 혐의로 투옥,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송병준은 방향을 완전히 틀어 일본으로 향했다. 1895년 무렵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스스로 일본식 이름인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 를 사용했다. 훗날창씨개명 1로 불릴 만큼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병참감부 군사통역관으로 귀국, 이용구와 함께 유신회·일진회를 조직하며 친일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에는보호청원선언서를 발표해 일본의 외교권 장악을 찬성했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체결된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에 찬성해정미칠적(定美七賊)’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한일병합 이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받았고, 일제의 자금 지원으로 조선일보 판권까지 인수했다. 그의 부는 조선의 피 위에서 세워진 권력이었다. 1925년 사망 후에는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 추도식이 열렸고, 그의 이름은 민족의 치욕과 함께 역사에 남았다.

 근대사적 의의

송병준은 단순한 개인의 변절자가 아니라 친일 세력을 조직화한 설계자였다. 일진회를 통해병합은 근대 문명의 길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내며, 조선의 주권을 넘기는 사상적 토대를 구축했다. 그의 정치와 담론은 권세를 위해 민족을 팔아넘긴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오늘의 시사점

송병준의 삶은 욕망이 신념을 이길 때, 한 개인의 변절이 국가의 비극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그는 조선을 팔아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의 이름은 백 년이 지나도 역사의 죄인으로 불린다. 변절은 언제나 실리를 얻지만, 결코 명예를 남기지 않는다.

 다온의 한줄 정리

 조직으로 변절을 설계한 남자, 송병준. 그의 부는 조선의 혼 값이었다.”

⑥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기념관 《친일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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