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교육·종교·계몽운동의 세 분야에서 민족정신을 지켜낸 지도자였다. 본관은 한산(韓山),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며 기존의 관료 체제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박정양의 식객으로 들어가 조언과 문서 업무를 맡으며 보좌했다.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파견될 때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 일본의 근대 문명과 교육제도를 직접 목격했다. 또한 1883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비서로 함께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의 학교, 교회, 의회 등을 견학하며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 근대 교육의 본질을 체험했다. 이 두 번의 해외 경험이 이상재에게 “나라를 살릴 길은 인재를 세우는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② 주요 활동 및 사상
귀국 후 그는 정부의 개화정책에 참여했으나, 을사늑약(1905) 체결 이후 벼슬을 완전히 버리고 민권과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했다. 서재필·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헌의6조 발표, 입헌정치와 자주독립을 위한 국민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배재학당 교사, YMCA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믿음·교육·양심”을 결합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늘 “나라의 부흥은 인재 양성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며 청년들에게 신앙과 실력, 도덕을 겸비한 지도자상을 가르쳤다.
③ 일화로 본 인품
‘현금 대신 교훈을 남긴 스승’ - 제자가 선물 봉투를 내밀자, 이상재는 웃으며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보답하라”고 말했다. 그는 늘 단벌옷으로 살면서도 “배움의 끝은 양심”이라 가르쳤다.
‘집을 팔아 청년을 돕다’ - 학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하려던 청년에게 자신의 집 일부를 팔아 학비를 내줬다. 훗날 그 청년이 독립운동가로 성장하자, 그는 “그대의 성공이 나의 보람”이라 말했다.
‘권력의 회유를 거절하다’ - 일제 조선총독부가 연금을 제안하자, “나는 나라를 잃은 죄인일 뿐, 일본의 은혜를 입을 수는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청년에게 길을 내주다’ (3·1운동 관련) - 1919년 민족대표 참여 제안을 받았으나 “이제는 청년의 시대”라며 고사했다. 대신 제자들을 격려했고, YMCA 청년들이 만세운동의 핵심 주체가 되었다.
④ 삶의 뒷면 — 빚과 가난의 이유
이상재는 한평생 가난과 빚 속에서 살았다. 그 이유는 단순한 생활고가 아니라 양심을 지킨 대가였다. 그는 과거에 실패해 관직 기반이 없었고, 을사늑약 이후 관직을 버리며 수입원을 끊었다. 배재학당과 YMCA 활동비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대부분을 청년과 학교에 쏟아부었다. 학비가 없는 제자들을 대신 내주고, 학교 건립비를 위해 집을 저당 잡히기도 했다. 일제의 회유와 연금 제안도 거절했으며, 말년에는 빚 독촉에 시달리며 병든 몸으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 “나는 빚을 지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다만 내게 빚을 진 이 나라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⑤ 근대사적 의의
이상재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근대의 첫 스승이었다. 그는 권력보다 양심을, 부보다 교육을 택했다. 그의 제자 안창호·이승훈·윤치호 등은 모두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립운동과 근대교육의 기둥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유길준의 지식개화가 ‘양심의 실천’으로 완성된 형태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본 근대 문명은, 그의 내면에서 ‘사람을 세우는 나라’라는 사명으로 바뀌었다.
⑥ 오늘의 시사점
이상재는 힘이 아닌 양심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이었다. 그는 화려한 벼슬보다 한 줄의 가르침을 남겼고, 돈보다 사람을 택했다. 그의 빚은 금전의 빚이 아니라, 시대의 양심이 진 빚이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지도자란, 그처럼 권력보다 진심을, 명예보다 청렴을 택할 수 있는 스승형 리더일 것이다.
⑦ 다온의 한줄 정리
“이상재의 빚은 돈의 빚이 아니라, 시대를 대신 갚은 양심의 빚이었다.”
⑧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상재」(한국학중앙연구원)
독립기념관, 「이상재 연보」
『매일신보』, 「신사유람단 명부」(1881)
주미조선공사관기록 (1883–1885)
YMCA 100년사
윤치호 일기 (191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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