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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4편 최익현 — 대원군에 맞서고, 굶음으로 의를 세운 사람

by daonara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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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동상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의병 지도자였다. 그는 벼슬길에서보다 글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 글자를 지키려 한 마지막 선비였다. 경기도 포천의 청렴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리학 경전과 예학에 밝았다. 그의 신념은 분명했다.

 사람의 몸은 작지만, 의는 하늘과 같다.”

그는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선비였고, 왕조의 몰락 속에서도 도덕의 주춧돌을 붙들고 버틴 사람이었다.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 “왕이 직접 다스려야 한다

그의 정치 인생은 흥선대원군과의 대립에서 시작됐다. 1860년대 대원군이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최익현은 상소문을 올려 고종의 친정(親政) 을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신하는 보필할 뿐, 다스림은 임금의 몫이옵니다. 임금이 직접 정치하지 않으면, 나라는 신하의 것이 됩니다.”

그의 상소는 대원군에게 직격탄이었다. “대원군은 권력을 위해 군신의 도리를 무너뜨렸다고 지적한 그는 결국 귀양을 당하지만, 이 사건으로 왕권의 정통성과 도덕적 리더십을 회복하려 한 선비로 평가받는다. 그는 쇄국정책 또한 비판했다. “문을 닫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길이 아니라, 세상을 등지는 일이라며 개혁적 보수 유학자로 불렸다. 그의 사상은변화를 부정한 선비가 아니라, ‘도덕을 바탕으로 개혁을 주장한 보수 혁명가에 가까웠다.

③ 을사늑약과 태인의병 봉기

1905,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상소를 올린다.

 이 조약은 왕을 속이고 백성을 판 매국의 죄악이다.”

그는 조정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라는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말로 통하지 않으면,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1906, 일흔이 넘은 노학자가 직접 칼을 들었다. 전라도 태인(太仁)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가 망해도 도리는 망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의 병력은 수천 명, 그는 병든 몸으로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다. 전투보다 더 강한 것은 그의 도덕적 존재감이었다. “의병의 깃발 아래 백성이 모이면, 그것이 곧 나라의 심장이라 믿었다. 그의 의병은 일본군의 토벌로 해체되었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된다.

 쓰시마(對馬島)에서의 마지막 날들 — “먹는 것도 의다

1906, 그는 쓰시마 섬에 도착했다. 일본 관리는 그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고, 일본의 음식을 드시라.”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적의 곡식을 삼키는 것은 내 혼을 더럽히는 일이다. 굶어 죽는 것이 의롭다.”

그때부터 그는 식음을 끊고 “몸은 일본 땅에 있으나, 내 뜻은 조선 하늘에 있다고 말했다.

아사(餓死) 논쟁

공식 기록에서는 그가일본의 쌀을 거부하고 단식 끝에 아사했다고 전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그는 풍토병과 노쇠로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으며, 단식이 아닌 질병과 노쇠로 인한 병사(病死)’였다는 견해도 있다.

, ‘아사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의 절개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는 실제로 일본의 음식을 거부했고, 며칠 동안 거의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결국 굶주림과 병세가 겹쳐 숨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은 굶주림의 결과가 아니라, 도리의 끝이 낳은 선택이었다.”

1906 11, 그는 74세로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일본의 경비 속에 조선으로 옮겨졌고, 조정과 백성 모두가 그의 절개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근대사적 의의

최익현은 단지 한 명의 의병장이 아니라 도덕으로 무장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는 개혁을 부정한 보수 선비가 아니라 “도덕으로 근대화를 이끌고자 한 정신적 개혁가였다.

그의 의병 봉기는 무력의 승리가 아니라 정신의 저항이었다. 그가 죽음으로 보여준 절개는 “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후 각지에서 의병운동을 이어갔고, 그 정신은 3·1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육체의 패배를 통해 정신의 승리를 남겼다.”

⑥ 오늘의 시사점

최익현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익보다 도리를 먼저 세울 수 있는가?”

그는 권력에 맞서고 죽음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단식이든 병사든 상관없다. 그의 정신이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이 진실이다. 오늘의 사회가 잊고 있는양심의 절개가 바로 그가 남긴 유산이다.

⑦ 다온의 한줄 정리

 그의 칼은 정의였고, 그의 죽음은 도리였다. 그는 행동으로 의를 증명한 사람이다.”

⑧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록 「최익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익현」

독립기념관 인물DB 「이달의 독립운동가」(2002 8)

『대한매일신보』(1906 11, 순국 보도)

정운현,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 평전』(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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