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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3편 신돌석—민초의 칼로 나라를 지킨 의병장

by daonara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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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생가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1900년대 초, 조선의 하늘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북 영덕의 한 농촌에서 양반의 피를 타고났으나 평민의 옷을 입고 세상을 일으킨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신돌석(申乭石, 1878~1908).

본관은 평산(平山),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이었다. 조부 때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 신성구는 농사와 잡역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신돌석은 어릴 적부터 밭을 갈며 무예를 익혔다. 혈통상으로는 양반이었지만, 현실의 삶은 완전한 평민이었다. 그는 서당 대신 들판에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배우며 자랐고, 그 속에서 **‘신분보다 인간이 먼저다’**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외쳤다.

 나라를 잃으면 백성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 싸워야 한다.”

그때부터 신돌석은 더 이상 농부가 아닌 조선의 첫 평민 의병장으로 불리게 된다.

 을사의병 3대 전투민중의 군대가 일어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신돌석은 영덕·평해·울진 지역의 상인과 농민들을 규합해영해의진을 조직했다. 그의 군대는 양반 중심이 아닌 민중 중심 의병대였다. 병사 대부분이 농민, 어민, 장정들이었고 그는 신분을 묻지 않았다. 오직조국을 향한 의리만이 기준이었다.

영해 전투 (1906 1)

영덕에 주둔하던 일본 헌병 분견소를 한밤중에 급습했다.그는 지형을 잘 아는 농민들을 선두에 세워 매복 전술을 구사했고, 일본군 20여 명을 사살하며 첫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 후 영해 일대는 잠시의병 자치 구역으로 바뀌었고, 백성들은 그를 조선의 로빈후드라 부르며 따랐다.

『매일신보』(1906.1.17)는 이렇게 썼다.

 농민 출신 신돌석, 왜적을 물리치다.” 공식 기록에서조차 그는 더 이상 양반이 아닌, 민중의 대표로 불렸다.

평해 전투 (1907 4)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평해읍성을 공격했다. 그는 야간 기습 후 위장 퇴각으로 적을 유인하고, 뒤이어 포위 공격을 감행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탄약과 보급품을 노획해 항전 능력을 강화했고, “병사보다 백성을 먼저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약탈을 금지했다. 이때부터 신돌석의 의병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도덕을 가진 군대’**로 불리게 된다.

울진 전투 (1908 2)

일제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그는 산악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맞섰다. 소수 병력으로 수십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지만, 병력과 보급의 한계로 후퇴를 선택해야 했다. 울진 전투는 을사의병의 마지막 대규모 항전이자 조선 민중이 외세에 맞선최후의 불꽃이었다.

 최후의 순간배신인가, 갈등인가

1908년 겨울, 신돌석은 병력을 재정비하던 중 피습을 당한다. 그의 죽음을 두고 두 가지 설이 전한다.

📖 공식 기록밀정의 배신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은일본군 밀정의 밀고로 피습 전사라 기록한다. 일제에 매수된 밀정이 은신처를 노출했고, 그는 끝까지 싸우다 총탄에 쓰러졌다고 전한다.

🌑 비공식 구술내부 갈등

그러나 일부 향토사 연구에서는, 식량과 지휘권 문제로 내부 불만 세력과 충돌해 신돌석이 먼저 폭력을 행사했다가 보복성 피습을 당했다는 설도 전한다. 이는 그의 죽음이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 속 인간의 고뇌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이 부딪힌 시대의 상처였다.”

인간 신돌석평민의 길, 양심의 리더십

그는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백성이 없으면 장수도 없다. 백성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다.”

신돌석은 싸우면서도 약탈을 금하고, 전투 후에는 피해 마을에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가난한 농민의 리더로서, 그는 힘보다 양심을 앞세운 전사였다. 그의 부대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정신은 훗날 독립군의 근본이 되었다. 평민이 스스로 일어선민중의 봉기’, 그 출발점이 바로 신돌석이었다.

 근대사적 의의

신돌석은 조선 후기 봉건질서가 무너지는 시점에 등장한 새로운 인간형의 지도자였다. 그의 존재는 항일운동의 주체가 양반에서 민중으로 이동했음을 상징한다. 양반의 피를 가졌지만, 그 피보다 더 뜨거운 것은 백성의 고통에 공감한 마음이었다. 그는 민중에게는 희망이었고, 일제에게는 가장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은 패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의 은유로 남았다.

오늘의 시사점

신돌석의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분노가 있었고, 판단의 실수가 있었으며, 끝내 외세의 힘 앞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불꽃은 단 한 번도 헛되지 않았다. 그의 싸움은승리한 전쟁이 아니라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간의 투쟁이었다.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 정신이다.

⑦ 다온의 한줄 정리 

 신돌석은 몰락한 양반의 피로 태어나, 평민의 심장으로 조선을 지킨 사람이다.”

⑧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돌석」

독립기념관, 「의병활동 자료집」

『매일신보』 (1906~1908)

영덕향토사연구회, 『의병장의 그림자』

국가보훈부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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