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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살린 자

제27편 여운형 — 좌우의 경계에서 조국을 꿈꾸다

by daonara 2026.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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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기념관 사진 - AI 재구성 이미지

 인물 개요

온화한 미소 속에 강철 같은 결의를 품은 사상가, 정치가. 그는 해방 이전엔 언론인으로, 해방 후엔 통합의 정치가로 살았다. ‘조선의 미소여운형(1886~1947). 그 이름은 지금도하나의 조국을 준비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② 주요 활동 및 사상

🕊 일본 유학과 독립의 자각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차별을 겪으며 ‘지식만으로는 독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9 11, 일본 도쿄 제국호텔 연설에서 그는 외쳤다.

 조선의 독립 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세우려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다.”

이 연설은 단순한 독립선언이 아니라, ‘민족 자주와 민주공화국의 미래상을 명확히 천명한 첫 선언이었다.

🏛 임시정부 참여와 비판

3·1운동 직후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했지만,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이상과 달리 파벌싸움과 무력한 논쟁이었다. 여운형은 현실 정치와 대중 조직화의 중요성을 느끼며 “민족의 독립은 책상 위가 아닌 거리와 민중 속에서 완성된다는 신념을 세운다. 이후 그는 언론과 교육, 체육단체(조선체육회 등)를 통해 ‘깨어 있는 시민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민족 스스로 세우는 근대국가였다.

해방 이후와 좌우합작 운동

1945 8 15, 해방의 기쁨이 찾아왔지만 그의 눈에는 새로운 전쟁이 보였다이념의 전쟁.

미군정이 친일 세력과 손잡는 현실, 소련군이 북한에서 공산화 정책을 펼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념은 다르지만, 민족은 하나다. 외세의 손이 아닌 조선의 손으로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는 좌익의 박헌영, 우익의 김규식 등과 손잡고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는 한반도의 분단을 막으려는 마지막 민족적 시도였다. 그러나 냉전의 파고는 너무 거셌고, 좌·우 모두 그를위험한 중도파로 몰았다.

🩸 좌우합작의 이상이 총탄에 쓰러지다

1947 7 19, 서울 혜화동 로터리.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던 여운형에게 청년 한지근이 총을 쏘았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나는 그래도 조국을 믿네.”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비극을 넘어, ‘이념을 넘어 하나의 조국을 세우려던 마지막 시도의 붕괴였다. 역사는 그의 죽음을 “분단 시대의 첫 희생이라 기록한다.

근대사적 의의

여운형은 이상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이해한 통합의 실천가였다. 그가 외세보다 민족을 믿었던 이유는 조선이 강대국의 바둑판 위에서 언제나로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들이 해방 이후 모두 북으로 향한 이유도 이념의 선택이라기보다 그가 꿈꾼하나의 조국이 남한에서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이상은 현실과 어긋났지만, 그 진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의 시사점

여운형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말한이념보다 민족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분단과 이념 대립의 그림자가 짙은 오늘, 그의 말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외세가 아닌 우리의 손으로, 다시 하나의 조국을 준비해야 한다.”

④ 다온의 한줄 정리

그는 이념의 시대를 살았지만, 인간의 조국을 꿈꾸었다.

 ⑤ 출처 및 참고

 국가보훈부 공훈록 「여운형」

독립기념관 인물DB

『건국의 문을 연 사람, 몽양 여운형』 (국사편찬위원회, 2017)

『몽양 여운형 평전』 (한홍구, 한겨레출판, 2018)

『한국민족운동사 연구총서』 (연세대학교 사학연구소, 2016)

『몽양 여운형, 통일을 꿈꾸다』 (민음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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