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이근택(李根澤, 1852~1911)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성종의 아들 경명군의 13대손이었다. 아버지 이민승은 조선 후기 어영청 파총(御營廳把摠) 을 지냈으며, 군무와 방위를 담당하는 무반 가문 출신이었다. 이근택은 1884년(고종 21년) 무과에 급제했지만, 진정한 출세는 능력이 아닌 인연의 결과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주로 피신한 명성황후를 시중 들며 신임을 얻어, 이후 군부대신, 참정 대신 등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중심에 섰다.
② 주요 행적
근택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무관으로 급부상했으나,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신념은 언제나 권력 쪽으로 기울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1905) 그는 일본의 강압에 굴복해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서명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굴욕의 순간을 상징했다. 그의 장인이자 충신으로 알려진 한규설(韓圭卨) 은 끝까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반면, 사위 이근택은 권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국의 주권을 내주었다. 한 집안 안에서 충절과 배신이 공존한 비극 — 그것이 곧 조선 말기 지배층의 초상이다. 그의 자손들은 일제강점기에도 교육계에 종사했으나, 조선의 혼을 잃은 집안의 역사적 그림자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③ 근대사적 의의
이근택은 조선의 멸망에 앞장선 정치가로, 그의 이름은 단순한 한 개인의 변절을 넘어 지식인과 관료 집단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도덕을 잃어갔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그의 배신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긴 사건의 일부였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정신이 무너진 순간이기도 했다.
④ 오늘의 시사점
권력과 이익이 정의보다 앞선 사회는 언제나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 이근택의 선택은 한 시대의 몰락을 초래했고, 도덕 없는 충성은 언제나 배신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의 이름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역사가 그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⑤ 다온의 한줄 정리
“왕실의 은총을 입었으나, 조국의 혼을 버린 사위. 충절의 집안에 남은 배신의 이름, 이근택.”
⑥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기념관 《친일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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