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박제순(朴齊純, 1858~1916)은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상도촌(현 용인시 처인구) 출신으로, 반남 박씨 가문 출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평재(平齋)였다. 조선 말 과거에 급제하여 내무·외무·참정대신 등을 지냈으며,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의 집안은 왕실과 먼 혈연으로 이어진다는 설도 있으나, 사료상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는다.
② 주요 활동 및 사상
초기에는 관료로서 개화 정책에 참여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조선에 깊이 뻗치자 일본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꿨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일본군 및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1905년 외부대신(外務大臣) 으로 있으면서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 가담하여 국권 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조선 통치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본이 독도를 불법 편입한 뒤,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는 지령 제3호를 내렸으나, 이는 실질적인 항의가 아닌 형식적인 조치로 끝났다. 결국 그는 나라를 지킬 기회를 외면하고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 안에서 안락을 택한 관리로 평가된다.
③ 근대사적 의의
박제순은 을사조약 체결 당시 외교의 책임자로서 조약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조선 외교권 박탈”의 장본인이 되었다. 그는 이후 일본이 수여한 작위와 재산으로 평온히 살았으며, 사후에도 그의 가문은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르며, 민족사적 반역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④ 오늘의 시사점
박제순의 행적은 단순한 한 개인의 변절이 아니라, 지배층이 현실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존엄을 내던진 사례다. 그가 내린 한 줄의 ‘독도 관련 지령’은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형식적 행동에 불과했다. 결국 그 침묵의 대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여전히 ‘독도는 일본 땅’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그가 남긴 ‘무책임한 침묵’의 역사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⑤ 다온의 한줄 정리
조선의 침묵은 그의 입에서 시작됐다. 입을 다문 자, 박제순. 그가 남긴 것은 조국의 상처와 일본의 논리였다.
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제순)
독도사료포털 (dokdo.nanet.go.kr)
용인일보 「용인 출신 친일인명사전 인물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동아일보 「형설수설 — 이완용의 죽음」(참고 비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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