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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魂)을 팔은 자

제3편 이근택 — 장인의 뜻을 저버린 사위, 충절 위에 선 배신

by daonara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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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 AI 생성 이미지

  인물 개요

이근택(李根澤, 1852~1911)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성종의 아들 경명군의 13대손이었다. 아버지 이민승은 조선 후기 어영청 파총(御營廳把摠) 을 지냈으며, 군무와 방위를 담당하는 무반 가문 출신이었다. 이근택은 1884(고종 21) 무과에 급제했지만, 진정한 출세는 능력이 아닌 인연의 결과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주로 피신한 명성황후를 시중 들며 신임을 얻어, 이후 군부대신, 참정 대신 등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중심에 섰다.

  주요 행적

근택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무관으로 급부상했으나,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신념은 언제나 권력 쪽으로 기울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1905) 그는 일본의 강압에 굴복해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서명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굴욕의 순간을 상징했다. 그의 장인이자 충신으로 알려진 한규설(韓圭卨) 은 끝까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반면, 사위 이근택은 권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국의 주권을 내주었다. 한 집안 안에서 충절과 배신이 공존한 비극그것이 곧 조선 말기 지배층의 초상이다. 그의 자손들은 일제강점기에도 교육계에 종사했으나, 조선의 혼을 잃은 집안의 역사적 그림자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근대사적 의의

이근택은 조선의 멸망에 앞장선 정치가로, 그의 이름은 단순한 한 개인의 변절을 넘어 지식인과 관료 집단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도덕을 잃어갔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그의 배신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긴 사건의 일부였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정신이 무너진 순간이기도 했다.

  오늘의 시사점

권력과 이익이 정의보다 앞선 사회는 언제나 같은 비극을 반복한다. 이근택의 선택은 한 시대의 몰락을 초래했고, 도덕 없는 충성은 언제나 배신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의 이름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역사가 그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온의 한줄 정리

 왕실의 은총을 입었으나, 조국의 혼을 버린 사위. 충절의 집안에 남은 배신의 이름, 이근택.”

⑥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기념관 《친일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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