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인물 개요
1879년(고종 1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安重根)은 무기를 들기 전, 먼저 교과서를 들었던 사람이다. 그의 독립운동은 총보다 붓에서, 복수보다 교육에서 시작되었다.
“나라의 기운은 글에서 일어난다.”
그는 백성의 눈을 깨워야 나라가 산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훗날 총성과 평화론으로 이어졌다.
② 교육으로 시작된 독립 — 삼흥학교와 돈의학교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 를 세웠다. ‘나라의 흥, 교육의 흥, 도의의 흥’ 세 가지를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그는 직접 교사로 나서 아이들에게 국문·산술·체조·윤리를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황해도 안악군에 돈의학교(敦義學校) 를 세웠다. ‘의(義)를 돈독히 한다’는 뜻처럼 가난한 농민 자녀에게 글과 실용기술을 무료로 가르쳤다.
“총보다 붓이 먼저 깨어야 나라가 산다.”
그의 교단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민족의 자존을 일으키는 작은 독립의 요람이었다.
③ 최재형과의 만남 — 행동가와 스승의 인연
1908년 말, 안중근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연해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을 만났다.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이자 거부로 재산과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그의 집에 머물며 의병의 새로운 방향과 행동 계획을 논의했다. 최재형은 그에게 자금과 무기, 그리고 무엇보다 ‘대의를 위한 용기’를 주었다.
“진정한 의병은 칼로 싸우되, 뜻으로 이겨야 한다.”
그 만남은 훗날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의 불씨가 되었다.
④ 단지동맹 — 피로 쓴 ‘대한독립’
1909년 3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 안중근은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피로 썼다. 이 결의가 바로 단지동맹(斷指同盟) 이었다. 유동하, 조도선, 김기용, 강기동, 한도재, 김형섭, 곽재화 등과 함께 “피로 맹세한 이상 물러섬이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의 피가 마르기 전에 조선을 다시 세우리라.”
그들의 피로 적힌 네 글자 ‘대한독립’. 그것이 곧 하얼빈의 총성으로 이어졌다.
⑤ 하얼빈 의거 — 세 발의 총성, 세계를 울리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만주의 하얼빈역. 러시아 헌병들이 도열하고 군악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특사 코코프체프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러시아 군복 차림의 청년 한 명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실행조 안중근, 경로 정찰을 맡은 조도선, 신호 담당한 유동하, 예비 사격을 지원한 우덕순, 후방 연락을 지원한 김기용, 탈출을 지원하기도 한 강기동까지 총 6명이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총성이 울린 건 단 세 번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부관과 통역관이 부상을 입었다. 안중근은 총을 높이 들고 외쳤다.
“나는 대한의 의병장 안중근이오! Корея ура! (코레아 우라!) — 대한 만세!”
‘우라(Ура)’는 러시아어로 ‘만세’ 혹은 ‘승리하자’의 뜻이다. 그는 하얼빈이 러시아 조계지였기에 현지 언어로 외쳤다.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외침이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인을 처단한 의병장이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될 때까지 총을 내려놓지 않았으며,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그의 얼굴엔 신념의 평온이 있었다”고 썼다. 이 장면은 러시아 『노보에 브레먀』, 일본 『요미우리』와 『아사히』 신문에 “그는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그날의 외침은 곧 ‘조선의 이름을 세계가 들은 첫 순간’이었다.
⑥ 옥중의 사상 — 이토의 ‘평화’에 맞선 ‘진짜 평화’
옥중에서도 그는 펜을 들었다. 《동양평화론》은 그가 남긴 마지막 유작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내세운 ‘동양평화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글이었다.
| 구분 | 이토의 ‘동양평화론’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
| 개념 | 일본 주도의 침략적 평화 | 3국의 평등과 공존의 평화 |
| 목적 | 식민지 확장 정당화 | 정의신의인의를 통한 평화 실현 |
| 주제 | 일본 중심 | 한국중국일본의 협력 |
| 본질 | 힘의 평화 | 양심의 평화 |
“이토의 평화는 칼의 평화요, 내가 바라는 평화는 사람의 평화다.”
그는 침묵이 아닌 이성으로 싸웠고, 죽음을 앞두고도 평화를 말했다.
⑦ 어머니의 편지 — 신념을 물려준 사랑
여순 감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받았다.
“나라를 위해 죽는 일을 부끄러워 말라. 네가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그 편지를 품고 매일 밤 기도했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다.”
그의 두 눈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직 평화만이 남았다.
“어머니가 신념을 낳았고, 아들이 그 신념을 완성했다.”
⑧ 재판과 순국 — 죽음보다 강한 신념
1909년 12월, 일본 관동도독부 법정. 안중근은 판사 앞에서도 한 치의 두려움이 없었다.
“이토는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인이다. 나는 대한의 의병장으로서 그 죄를 벌하였을 뿐이다.”
그는 변호를 거부했고, 끝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 그는 어머니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국이 독립하면 내 유해를 고국 땅에 묻어다오.”
그의 유해는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확한 묘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형이 집행된 1910년 3월 26일 여순(뤼순) 감옥 근처의 공동묘지에 암매장되었는데 일제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서 가족이나 동지 누구도 묘를 확인하지 못했다. 서울 효창공원에 세워진 묘는 가묘(假墓) 로, 그의 이름을 새긴 상징의 자리일 뿐이다.
“몸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뜻은 이미 조국의 가슴에 묻혔다.”
⑨ 근대사적 의의
안중근은 총을 든 의병장이자, 교육가이자, 평화사상가였다. 그의 곁에는 스승 최재형이 있었고, 그의 마음에는 어머니 조마리아가 있었다. 그의 삶은 피와 도덕, 사상과 사랑이 하나로 이어진 서사였다. 그의 총은 정의였고, 그의 죽음은 도리였다.
⑩ 다온의 한줄 정리
“그의 총은 원한이 아닌 정의였고, 그의 피는 복수가 아닌 평화였으며, 그 평화의 길엔 스승의 뜻과 어머니의 사랑이 함께 있었다.”
⑪ 출처
『안중근전집』, 독립기념관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보훈부 공훈록 「안중근」
『대한매일신보』(1909년 10월 27일자)
안중근, 《동양평화론》(1910, 여순감옥 저술)
『최재형 평전』(도진순, 2014)
『조마리아 평전』(윤형숙, 2019)
『노보에 브레먀』(1909년 10월 28일자 보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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