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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 민종식 — 왕의 밀지를 품은 충절의 칼 ① 인물 개요민종식(閔宗植, 1861~1921)은 조선 말기 충청 의병운동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벼슬길의 부귀보다 ‘도리’를 택한 선비였고, 나라가 기울자 붓을 던지고 칼을 든 사람이었다. “벼슬로 나라를 구할 수 없다면, 피로라도 지켜야 한다.”그의 생애는 권력의 길이 아니라 양심의 길, 그리고 한 사람의 충신이 나라의 주춧돌이 되려 한 이야기였다.② 고종의 밀지 — 황제의 뜻을 받은 의병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정은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몇몇 충신에게 비밀 밀지(密旨)를 내려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라”고 명했다. 민종식은 바로 그 밀지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공주의 옛 관찰사로서 지방 사정을 꿰뚫고 있었고, 그 명을 받들어 충청.. 2025. 10. 31.
제4편 이지용 — 왕족의 이름으로 나라를 팔고, 스스로를 변명한 자 ① 인물 개요이지용(李址鎔, 1854~1926)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17대손으로, 전주 이씨 왕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실질적인 왕족 신분을 얻었고, 이를 발판으로 조정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젊은 시절부터 도박과 향락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왕족이라는 이름으로 방종을 일삼았다. 그러나 신분이 주는 특권은 그를 끝내 권력의 중심으로 이끌었다.② 주요 행적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그는 일본 측의 회유를 받고 1만 엔의 대가로 서명했다. 그의 펜 끝에서 조선의 외교권이 팔려나갔고, 그 순간부터 그는 권력의 길 위에 완전히 일본의 그림자가 되었다. 1년 뒤인 1905년, 그는 내부대신으로서 을사늑약에 서명하며 을사오적 중 한 명이 .. 2025. 10. 30.
제4편 최익현 — 대원군에 맞서고, 굶음으로 의를 세운 사람 ① 인물 개요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의병 지도자였다. 그는 벼슬길에서보다 글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義)’ 한 글자를 지키려 한 마지막 선비였다. 경기도 포천의 청렴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리학 경전과 예학에 밝았다. 그의 신념은 분명했다. “사람의 몸은 작지만, 의는 하늘과 같다.”그는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선비였고, 왕조의 몰락 속에서도 도덕의 주춧돌을 붙들고 버틴 사람이었다.②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 “왕이 직접 다스려야 한다”그의 정치 인생은 흥선대원군과의 대립에서 시작됐다. 1860년대 대원군이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최익현은 상소문을 올려 고종의 친정(親政) 을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신하는 .. 2025. 10. 30.
제3편 신돌석—민초의 칼로 나라를 지킨 의병장 ① 인물 개요1900년대 초, 조선의 하늘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북 영덕의 한 농촌에서 양반의 피를 타고났으나 평민의 옷을 입고 세상을 일으킨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신돌석(申乭石, 1878~1908).본관은 평산(平山),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이었다. 조부 때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 신성구는 농사와 잡역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신돌석은 어릴 적부터 밭을 갈며 무예를 익혔다. 혈통상으로는 양반이었지만, 현실의 삶은 완전한 평민이었다. 그는 서당 대신 들판에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배우며 자랐고, 그 속에서 **‘신분보다 인간이 먼저다’**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외쳤다. “나라를 잃으면 백성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 2025. 10. 30.
제2편 이상재 — 양심으로 나라를 지킨 스승 ① 인물 개요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교육·종교·계몽운동의 세 분야에서 민족정신을 지켜낸 지도자였다. 본관은 한산(韓山),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이다.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며 기존의 관료 체제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박정양의 식객으로 들어가 조언과 문서 업무를 맡으며 보좌했다.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파견될 때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 일본의 근대 문명과 교육제도를 직접 목격했다. 또한 1883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비서로 함께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의 학교, 교회, 의회 등을 견학하며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 근대 교육의 본질을 체험했다... 2025. 10. 30.
제3편 이근택 — 장인의 뜻을 저버린 사위, 충절 위에 선 배신 ① 인물 개요이근택(李根澤, 1852~1911)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성종의 아들 경명군의 13대손이었다. 아버지 이민승은 조선 후기 어영청 파총(御營廳把摠) 을 지냈으며, 군무와 방위를 담당하는 무반 가문 출신이었다. 이근택은 1884년(고종 21년) 무과에 급제했지만, 진정한 출세는 능력이 아닌 인연의 결과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주로 피신한 명성황후를 시중 들며 신임을 얻어, 이후 군부대신, 참정 대신 등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중심에 섰다.② 주요 행적근택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무관으로 급부상했으나,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신념은 언제나 권력 쪽으로 기울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1905) 그는 일본의 강압에 굴복해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서명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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