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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22

제22편 이인직 — 펜으로 나라를 팔고, 권력의 그림자 속에 글을 쓴 사나이 ① 인물 개요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언론인·소설가·관료·정치가로 활동했던 대표적 친일 지식인이다. 그는 신문과 문학이라는 근대의 언어를 누구보다 빨리 익혔지만, 결국 그 언어를 제국의 논리를 전파하는 도구로 바꾸었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학문을 배우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점차 일본 제국의 세력에 기대어 이완용의 비서 겸 정치적 후원자 관계로 들어가며 친일 노선을 뚜렷이 드러냈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이인직은 186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학문에 관심을 보였다. 1880년대 일본에 유학하여 근대 정치와 신문학을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독립신문, 제국신문.. 2025. 12. 5.
제21편 민영휘 —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버린 귀족 ① 인물 개요영휘(閔泳徽, 1852~1935)는 조선 후기의 고위 관료이자, 한일병합 이후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친일 상류층 인물이다. 그는 명성황후 민씨와 같은 여흥 민씨 일가의 방계, 즉 황실 인척 세력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 재정과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고종의 처남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명성황후의 먼 친척에 해당한다. 조선의 몰락기, 그는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결국 일본 제국의 품으로 들어갔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민영휘는 19세기 말, 명문 여흥 민씨 가문의 권세를 배경으로 내무대신·탁지부대신 등 요직을 맡아 대한제국의 재정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나 국고가 기울고 정치적 신뢰가 흔들리자, 그는 황실 재정을 사유화하고 일본 측과의 재정 거래로 막대한 사재를 축적했다. 19.. 2025. 11. 26.
제20편 송종헌 — 세습된 그림자 ① 인물 개요송종헌(1894~1949)은 한일병합을 주도한 송병준의 장남으로, 부친이 후작으로 책봉되자 아무런 공적 없이 자작(子爵) 작위를 세습했다. 그는 조선 귀족제의 2세대이자, ‘매국의 세습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나라를 팔아 권세를 얻었다면, 아들은 그 대가로 귀족의 특권을 누리며 식민 권력의 충실한 협력자로 살았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1910년 한일병합 직후, 부친 송병준이 후작으로 승작되자 자작 작위를 세습.1911년 이후, 조선귀족회 회원으로 등록되어 일본 귀족들과 교류하며 은사금과 귀족연금을 수령.1933년, 일제 식민통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일본의 식민 행정을 정당화하는 데 협력.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전보국단·조선유도연합회 등 전시 협.. 2025. 11. 24.
제19편 윤갑병 — 권력의 충성으로 민족을 팔아 넘긴 관리 ① 인물 개요윤갑병(尹甲炳, 1863~1943)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료와 정치 실무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개화에 호의적인 지방 엘리트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진회에 참여하면서 친일 노선으로 전향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며 강원도지사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그는 명분보다 권력을 택했고, 결국 일본 제국의 충실한 하급 파트너로 남았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윤갑병은 파평 윤씨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서북 지역에서 교육과 행정 실무에 종사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도우며 일본 측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그는 일본의 세력이 조선을 지배할 것을 확신했고, 결국 1904년 이용구·송병.. 2025. 11. 23.
제18편 정운복 — 배움으로 시작해, 배신으로 끝난 개화 지식인 ① 인물 개요정운복(鄭雲復, 1870~1920)은 황해도 평산 출신의 개화파 지식인으로, 근대 교육과 문명 사상을 내세웠으나 결국 일제에 협력하며 한일병합을 지지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해외 유학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배우고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지만, 그 꿈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일본 의존형 개화론’으로 변질되었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정운복은 1870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하며 근대 문명과 자유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는 귀국 후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1899년 귀국 후 개화운동에 참여했지만, 그의 개혁은 점차 친일적 실용주의로 기울어갔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 흑산도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이 시기를 지나며 “조선의 근대는 일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2025. 11. 22.
제17편 유학주 — 법의 이름으로 항일을 재단한 판관 ① 인물 개요유학주(柳鶴周, 생몰년 미상, 1850년대생 추정)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활동한 사법·행정 관료형 친일 인물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1907년 평리원 판사로 임명되었고, 일본의 통제 아래 의병 관련 재판을 담당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 체제에 협력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유학주는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지만, 그의 이름은 “법의 외피로 포장된 식민 협력”의 대표 사례로 남았다.② 주요 활동 및 사상유학주는 평안북도 구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절 행정 관료로 관직에 올랐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통감부가 사법권을 장악하던 시기, 그는 최고 사법기관인 평리원의 판사로 발탁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일본 통감부의 .. 2025.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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